「386 간첩단」사건과 主思派 – (대담) 主思派는 대한민국에 반역을 했다

『金大中씨는 韓民戰 지침을 잘 알고 있는 우리의 동지였다』

배진영    ironheel@chosun.com

『金大中씨와는 20여 차례 만나… 그는 韓民戰 지침을 잘 알고 있는 우리의 동지였다』(李東湖 前 全大協 연대사업국장)

『主思派 운동은 간첩조직의 대중화를 의미, 대한민국은 이미 赤化되었다』(姜吉模 前 연세大 反美청년회)

李東湖 前 全大協 연대사업국장
1959년 울산 출생. 연세大 신학과 졸업. 全大協 연대사업국장. 뉴라이트전국연합 조직위원장 역임. 現 북한민주화포럼 사무국장.

姜吉模 前 연세大 反美청년회
1961년 전북 익산 출생. 연세大 신학과 졸업. 연세大 중앙대의원회 의장, 반미청년회 연세大 교육책, 기독교사회운동연합 간사, 공보처 전문위원, 한나라당 부대변인 역임. 現 인터넷 「프리존 미디어」 편집인.기독교 청년운동으로 학생운동 시작  국가정보원의 「386간첩단 사건」을 계기로 1980년대 主思派(주사파)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대개의 경우 순수한 反독재투쟁에 머물던 학생운동이 어떻게 해서 입으로는 「민주화」를 외치면서 金日成 독재체제를 盲從(맹종)하게 되었을까?

  1980년대 중·후반 主思派 학생운동의 핵심에 있었던 李東湖(이동호) 前 全大協 연대사업국장과 姜吉模(강길모) 前 반미청년회 연세大 교육책과의 대담을 통해, 당시 主思派 운동권의 의식을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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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東湖 前 全大協 연대사업국장

사회(月刊朝鮮 裵振榮 기자) 학생운동은 어떻게 해서 시작하셨습니까.

李東湖 원래 저는 목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1979년 영남신학교에 입학, EYC 부산지역 총무, 대한예수교장로회청년연합회 총무 등을 맡으면서 기독교 청년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人權(인권)문제에 눈을 떴고,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학생시위에 참가하면서 全斗煥 정권을 敵(적)으로 여기게 됐습니다.

姜吉模 저도 1979년 기독청년운동에 참여하면서 운동권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1980년 중앙大 법대에 입학, 5·17 때 법대 학년 과대표로 학생시위에 참여했다가 「권고자퇴」 형식으로 제적됐습니다.

사회 두 분 다 기독교 청년운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시작하셨군요.

姜吉模 당시 기독교청년운동은 곧 민주화운동이었습니다. 공안기능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상황 아래서 그나마 反정부 운동을 할 수 있는 곳이 종교의 外皮(외피)를 쓰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운동을 통해 의식화 초기 단계를 밟았습니다.

姜吉模 前 연세大 反美청년회



姜吉模 1979년 말부터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나 李泳禧(이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우상과 이성」, 그리고 일본에서 나온 左翼 서적들을 읽으면서 의식화되었습니다. 1981년 중앙大 법대에서 제적된 저는 神學(신학)공부를 제대로 하는 것이 기독교 운동을 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 1982년 연세大 신학과에 진학했습니다.

  1983년 軍에 입대했다가 1985년 복학했는데, 그 사이에 세상이 바뀌어 있더군요. 입대 전만 해도 조잡하게 인쇄된 팸플릿으로 보던 「자구발(자본주의 구조와 발전)」 같은 이념서적들이 정식으로 출간돼 학교 앞 서점에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全斗煥 정권이 1984년 학원자율화 조치를 취하면서 단속이 느슨해지면서 이념서적이 봇물 터지듯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죠.

李東湖 1985년 학내 이념서클 활동을 하면서 左翼 이론서, 러시아·중국·라틴아메리카의 혁명사,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서들을 읽었습니다. 특히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읽으면서 기존의 역사인식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李承晩(이승만)은 日帝 시대에 독립운동에 기여한 바 없이 호의호식하던 인물이었다」, 「6·25는 內戰(내전)이었다」는 얘기는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主體思想 중 「품성론」에 매료돼

사회 두 분 모두 기독교인들이었는데, 左翼사상에 대한 거부감은 들지 않았습니까.

姜吉模 당시 유행처럼 번지던 「해방신학」이나, 해방신학의 亞流(아류)인 「민중신학」을 접하면서, 「예수가 오늘날 한국 사회에 再臨(재림)한다면 총을 들고 혁명가가 될 수밖에 없다」, 「소외계층의 이익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李東湖 저의 경우에도 左翼사상에 대한 거부감은 민중신학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상당 부분 해소되었습니다.

사회 主體사상은 언제 접하게 됐습니까.

姜吉模 1984~1985년 운동권에서는 NL(민족해방·主思派)-PD(민중민주)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저는 대중투쟁이 긴요하다고 생각해서 NL에 가담했습니다.

李東湖 1986년 윗선을 통해 「강철서신」, 「主體사상에 대하여」 등의 문건이 내려왔습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주요 대학의 종교·문화·역사 서클이나 단과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패밀리」를 통해 운동이 이루어졌는데, 1986년 여름 「패밀리」가 없어지고 「NLPDR(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論이 도입되면서 「구국학생연합」(서울大), 「애국학생회」(고려大) 등이 운동을 이끌게 됐습니다.

사회 主體사상을 처음 접했을 때, 느낌이 어떻던가요.

李東湖 매우 좋았습니다.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물질적 조건을 중시하는 이론이라면, 主體사상에서는 인간의 자주적 의식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姜吉模 「강철서신」에 나타난 「품성론」을 보면서, 주변의 운동권 학생들에게서 평소 느꼈던 문제점들을 잘 지적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부 운동권 학생들의 「행세주의적」 행태를 비판한 것이 설득력 있게 느껴졌습니다.


主體思想을 거부감 없이 수용

主思派가 장악한 全大協은 親北성향을 감추지 않았다. 1992년 남총련 집회에 등장한 인공기.

사회 主體사상은 한편에서는 「인간의 자주적 의식」을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首領論(수령론)」을 내세워 크게는 金日成-金正日, 작게는 全大協이나 韓總聯 의장 등 「작은 首領들」에게 盲從할 것을 강요합니다. 이런 모순을 느끼지 못했습니까.

李東湖 「主體사상에 대하여」에서는 「수령론」에 대한 언급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우리가 「수령론」을 접하게 될 무렵에는 이미 조직에서 책임 있는 위치에 있어 빼도 박도 못 하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논리」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變革(변혁)하는 것이었습니다.

姜吉模 그때 우리가 인식하기로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경제는 승승장구했고, 金日成은 항일독립운동의 영웅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金日成에게 수령으로서의 자질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수령론」을 공부할 단계에 이르러서는 그것을 달달 외는 것이 중요했지, 논리가 필요하지 않았어요.

사회 「金日成 유일사상 10大 원칙」은 인간의 자유로운 思考(사고)와 행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전체주의의 극치입니다. 당시 全斗煥 정권의 권위주의에 반대했던 사람들이 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극단적인 전체주의인 主體사상을 향해 달려간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李東湖 그때 우리는 李承晩의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면서, 李承晩의 親美(친미)·親日(친일)은 朴正熙·全斗煥에게 이어져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는 日帝시대 만주에서 혁혁한 戰果(전과)를 올린 민족의 영웅 金日成, 그리고 혁명과 건설에 성공한 북한이라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이를 보면서 金日成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숭배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것이 「金日成 유일사상 10大 원칙」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姜吉模 당시 NL노선에서는 PD노선류의 「자기만족적 급진주의」를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라는 구호를 내세웠습니다. 운동방식을 받아들이다 보니, 그 바탕이 되는 主體사상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사회 主體사상이 순식간에 학생운동권을 장악하게 된 이유는 어디 있습니까.

姜吉模 첫째, 앞에서 말한 「품성론」이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둘째, 한국적 현실을 강조하는 NL노선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기계적으로 국내에 적용하는 PD노선보다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대중노선에 적합했던 것입니다.

  셋째, PD논리대로라면 혁명의 主力은 노동자고, 청년학생은 보조적 역할에 머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자주적 역할을 강조하는 主體사상에서는 청년학생들도 혁명운동의 당당한 主力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主思派의 경우 복잡한 마르크스-레닌주의 原典(원전)을 보고, 「자본론」을 읽고, 「사구체(사회구성체) 논쟁」을 벌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主思派의 논리는 간단했습니다. 누군가가 「이론」을 따지면, 「자세가 불량하다」, 「지금은 나가야 할 때지, 이론을 가지고 논쟁해야 할 때가 아니다」라는 말로 입을 막으면 그만이었습니다.


「投身」 논리로 主思派 사회로 확산

사회 主體사상이 대학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전반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姜吉模 主思派가 내세웠던 「投身(투신)」이라는 논리의 영향이 큽니다.

사회 「투신」이요?

姜吉模 마르크스-레닌주의 아래서는 노동자가 혁명의 主體라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대학을 졸업한 후 계속 혁명운동을 하려면 노동운동 현장에 뛰어들어야 했습니다. 자신의 계급적 기반을 바꾸는 것인데, 이것을 「移轉(이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지 못하면 혁명가로서 불철저하다는 비판을 받아야 했지요.

  실제로 대학 졸업 후 많은 사람들이 노동현장으로 뛰어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고민 끝에 운동을 떠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主思派에서는 「移轉이 아니라 投身이다」라는 논리를 내세워 그런 고민을 단숨에 해결했습니다.

사회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姜吉模 진보적 학생·지식인도 혁명의 主體로 인정하는 主思派는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考試(고시) 패스, 정당·시민단체 진출, 신문·방송 진출, 기업체 취직, 사업 등을 통해 사회 각 부문에 진출해서도 얼마든지 혁명운동을 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때문에 主思派의 경우, 학생운동 역량이 그대로 사회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首領論」 고민 안 해

사회 1980년대 후반 이후, 全大協이나 한총련 의장이 새로 선출되면, 그의 영명함과 헌신성을 강조하면서 그를 따라 배워야 한다는 내용의 대자보가 붙더군요. 그게 「수령론」과 「품성론」의 소산이겠는데, 저는 그게 영 역겨웠습니다.

姜吉模 그게 「지도 求心(구심)의 옹위 노력」을 강조하는 것이죠. 「지도자를 비난하면 언제 일하나. 지도 구심을 세우고 받드는 것이 올바른 일이다」는 논리죠.

사회 「수령론」과 主體사상이 강조하는 「인간중심」 사상이 충돌한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습니까.

姜吉模 主體사상에서는 사회를 하나의 有機體(유기체)로 보면서, 「수령은 腦髓(뇌수)고, 그 뇌수를 따르는 것이 각 肢體(지체)들이 자주·창의성을 발휘하는 통로」라고 설명합니다. 그 뇌수는 민주집중제를 통해 옹위한 뇌수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고, 金日成은 민중이 옹립한 것이므로 「金日成=민중」이라는 것이죠.

사회 뇌수가 잘못된 판단을 내릴 경우에 대한 고민은 안 해보셨습니까.

姜吉模 主思派는 그런 고민을 안 하죠.

李東湖 「金日成의 지도력은 지난 혁명의 과정에서 역사가 증명했다」고 생각하는 거죠.

姜吉模 그때는 美帝와 싸우면서 한민족은 물론 세계 인민의 자주성을 옹호하는 金日成의 존재가 더 없이 위대하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사회 李東湖씨께서는 全大協에서 활동하셨죠.

李東湖 당시 학생운동권은 서울大의 관악자주파, 연세大의 祖統(조통)그룹, 고려大의 反美청년회 등의 사상서클들이 이끌고 있었습니다. 저는 조통그룹 멤버로 연세大 비밀학생회(언더 조직) 중앙위원으로 일했습니다.

  종래에는 총학생회와 언더조직이 괴리되어 있었는데, 「활동가들이 총학생회를 전투적으로 강화하라」는 「전투적 학생회론」이 제기되면서, 연세大 총학생회 기획부 차장을 맡았습니다. 이후 全大協 연대사업국장으로 일했습니다.

사회 韓民戰의 지령을 받았습니까.

李東湖 그렇죠.

사회 직접 라디오로 韓民戰 방송을 들었습니까.

李東湖 저는 직접 듣지는 않았습니다. 「BC(Broadcast의 약칭)팀」이라고 하는 방송청취팀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들이 短波(단파)라디오로 韓民戰의 소리 방송을 듣고 녹취한 후 타이핑해서 지도부로 보냅니다. 지도부에서는 여기에 「자주의 길」 등의 제목을 붙여 팸플릿으로 만들어 배포했습니다.

사회 主思派 운동권에게 韓民戰은 어떤 존재였습니까.

李東湖 「남조선 혁명의 지도부」로 인식했습니다. 「韓民戰 강좌」를 통해 운동론·사상·黨역사 등을 공부했습니다.

사회 韓民戰이 북한의 對南혁명 前衛(전위)기구라는 인식은 없었습니까.

李東湖 韓民戰 방송은 사정상 평양에서 하고 있지만, 지도부는 남한內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우리는 韓民戰이 사정상 실체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고, 스스로의 역할은 韓民戰의 보조 역할에 그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全大協 신년사는 韓民戰 신년사를 말만 조금 바꾼 것이었습니다. 그나마 한총련 시절에 가서는 韓民戰 신년사를 글자 하나 안 바꾸고 그대로 내보내더군요.

사회 全大協 연대사업국장이 하는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李東湖 全大協과 정당·노동운동·빈민운동·在野단체들 간의 협력을 구하는 일을 했습니다.


『金大中은 우리의 「동지」 였다』

사회 金泳三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나 金大中 당시 평화민주당 총재와도 만났습니까.

李東湖 1988년 남북학생회담 관계로 만난 적이 있습니다.

사회 남북학생회담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어떻던가요.

李東湖 金泳三씨는 솔깃해했는데, 김덕룡씨가 「거리를 두자」면서 막더군요.

사회 金大中씨는요.

李東湖 金大中씨와는 20여 차례 만났습니다. 그가 韓民戰에서 내리는 현안 관련 지침들을 잘 알고 있어 놀랐습니다. 아마 在野담당 비서를 통해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당신들 입장은 잘 알지만, 야당 입장에서는 너무 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반발만 앞서 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사회 당시 金大中씨를 어떻게 보았습니까.

李東湖 그는 우리의 「동지」였습니다. 그는 韓民戰을 우리와 동일한 시각에서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金泳三씨는 韓民戰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던가요.

李東湖 그는 통 모르더군요.


RP작업

반미청년회는 1988년 구국결사대의 서울 美문화원 점거 사건을 배후 조종했다.

사회 각 대학 총학생회, 서대협(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나 全大協 의장 등 학생운동 지도부는 어떻게 선발, 양성했습니까.

李東湖 그 부분은 姜吉模씨가 잘 알고 있습니다.

姜吉模 낚싯밥은 물고기가 모이는 곳에 던지는 법입니다. 학생운동의 경우, 이념서클이나 종교서클·과별 학회는 물론, 음악·스포츠 서클 등이 거기에 해당됐습니다. 후배들을 지켜보다가 싹수가 있다고 판단되면 따로 만나 일대일로 의식화 교육을 하거나, 기수별로 혹은 핵심들을 모아 집단으로 교육했습니다.

  대개 핵심을 뽑아 집단으로 가르칠 때 가장 효과가 좋았습니다. 그러면서 집회 참석과 발언, 시위 때 投石(투석), 街鬪(가투: 거리투쟁) 참여 등을 통해 그들에게 스스로 대단한 학생운동가인 것처럼 자부심을 갖게 하면서 그중에서 「품성」을 가진 사람들을 발탁했습니다.

사회 그중에서도 핵심적인 人材들은 어떻게 키워 냈습니까.

姜吉模 반미청년회의 경우 「RP (Reproduction)」 작업은, 주로 정치학교를 열어 핵심 활동가들을 선정, 교육했습니다. 이들을 교육할 때에는 「새벽 4시에 교내에서 가장 은밀한 장소에 집결하라」는 식으로 지시를 내립니다. 그들이 지정된 장소에 나타나면 거기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다음 장소를 지시합니다. 그런 식으로 여러 장소를 거친 후 교육 장소에 다다르게 합니다. 이것은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선택된 자」로서의 자긍심을 느끼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회 일종의 「신비주의 전술」이네요.

姜吉模 신비주의 전술은 또 있죠. 운동을 하면서 우리는 10여 개의 假名(가명)을 사용했습니다. 나와 李東湖씨도 서로를 「명진대사」, 「오공형」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것은 모두 우리가 대단한 체계를 갖춘 조직인 것으로 인식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를 「北에서 내려온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私製폭탄 들고 美문화원 점거

사회 그렇게 해서 교육한 사람들로는 어떤 사람들이 있습니까.

姜吉模 당시 主思派 학생운동 지도조직에서 교육을 받았거나 主思派 조직 출신으로서 권력의 중추로 진출한 사람들로는 우상호·이인영·오영식 열린당 의원 등 全大協 출신 여당의원들과 盧武鉉 대통령 측근인 안희정씨, 김만수 前 청와대 대변인, 김성환 청와대 副대변인, 문용욱 청와대 제1부속실장, 여택수 前 대통령제1부속실 행정관 등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제가 직접 교육을 담당한 경우는 85학번 연세大 운동권 출신 활동가들이었고, 다른 학교 출신들은 각자 소속 학교 또는 학교 간 연대로 이뤄진 主思派 지도조직에서 교양을 받았다고 보면 됩니다.

사회 얼마 전 그런 내용이 보도되자, 그들은 『姜吉模씨가 그럴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고 주장하더군요.

姜吉模 제가 몸담았던 반미청년회는 고려大 82학번 조혁씨가 주도적으로 만든 조직입니다. 당시 수배 상태였던 조씨가 주요대학 활동가들의 연결선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大를 주축으로 전국적인 학생운동 지도조직을 재건했던 것이지요.

  그 과정에서 연세大 쪽 활동가들도 포섭했고, 연세大 쪽 반미청년회원들은 「구국결사대」란 것을 조직해서 사제폭탄을 만들어 미국문화원 점거시위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도 반미청년회원으로 포섭됐고, 주로 RP작업을 수행하는 교육책으로 활동했습니다.

  언론보도에 앞에 거론된 사람들을 모두 내가 교육한 것으로 나갔기 때문에 약간의 오해가 있었습니다만, 저는 「제가 속한 조직에서 교육했다」고 일관되게 말씀드렸습니다. 거론된 인사들 중에는 저한테 교육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저를 교육했어야 할 인물들이 더 많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나한테 「교육을 안 받았다」거나 「그 사람 모른다」는 반응은 있어도, 「나는 主思派 출신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 주목해야 할 점이라고 봅니다.

사회 主體사상에 대해 언제부터 회의를 갖기 시작했습니까.

姜吉模 학생운동이 메커니즘에 同化되면서 점점 운동권內에서의 위치가 올라가게 됐습니다. 리더십을 유지·강화하기 위해 조직의 노선과 이념에 가장 충실하고자 노력했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북한과 직접적인 커넥션을 갖는 데 대해서는 어딘지 내키지 않았습니다.


主體사상으로부터의 탈출

李東湖 1988년 5共 청문회가 열리고 5共 청산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높아졌습니다. 당시 全大協 지도부에 있던 저는 대중투쟁을 위해서는 在野(재야)세력과 연대해서 「전두환·이순자 구속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韓民戰에서는 계속 「분단 올림픽 반대, 공동 올림픽 개최」, 「駐韓美軍 철수」 등 국민정서와 괴리된 지침만 고집하다가, 全大協이 「전두환·이순자 구속투쟁」에 들어간 지 두 주일가량 지나서야 「5共 청산 투쟁」을 지시하더군요. 그때 처음으로 「韓民戰도 별거 아니네」라는 생각이 들면서, 韓民戰에 대한 신비감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사회 東歐(동구) 사회주의의 붕괴가 主思派에서 벗어나는 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나요.

李東湖 솔직히 東歐·소련의 붕괴에서 충격을 받기는 했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어요. 「체제는 무너졌지만, 이념은 남아 있다」고 생각했고, 우리에게는 북한이라는 존재가 남아 있었습니다.

  졸업 후 학원강사로 나섰는데, 학부모들을 보니 다 잘 먹고, 잘 살고 있더군요. 「사회에 불평불만이 가득해야 혁명이 가능한데, 우리가 생각하던 사회와는 많이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 黃長燁(황장엽) 前 북한노동당 비서가 망명해 온 후, 그의 글을 통해 북한의 실상을 접했는데, 그게 결정타가 됐습니다.

姜吉模 東歐 사회주의 붕괴 이후 朴聖焌(박성준: 韓明淑 총리의 남편) 교수의 지도로 운동권 출신과 左翼 지식인들이 모여 「한반도에서 과연 혁명은 가능한가」라는 문제를 놓고 제법 오랫동안 스터디를 했습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原典을 다시 읽으면서 한국 사회를 再조명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혁명론과 현실의 차이를 인식했고, 「한국 사회에서 단시일 내에 혁명은 불가능하다. 지금은 改良主義(개량주의) 노선, 낮은 단계에서의 운동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후 이해하고 넘어가기 어려운 북한의 현실을 목도했습니다.

지난 11월2일「전향386」들은 간첩단 사건에 대한 철저 수사를 촉구했다.

主思派 안 없어진 것은 親北정권과 북한 때문

사회 姜吉模씨께서는 金泳三 정권에서 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姜吉模 사회주의 혁명이념을 포기한 후, 공보처 전문위원으로 대통령에게 여론을 분석하고 정책을 건의하는 일을 했습니다.

사회 권력 주변에서 일해 보니 어떻던가요.

姜吉模 國政(국정)에 관한 많은 정보들을 접하면서, 학생운동 시절 제 시야가 얼마나 좁았던가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대통령에게 정책을 건의하려고 해도, 제게 그걸 뒷받침할 만한 콘텐츠가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그 때 「권력만 잡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구나」,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던 많은 일들이 국민들의 실제적인 삶의 質(질)을 향상시키는 데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되나」 하는 생각을 절실히 했습니다. 아마 지금 정권을 잡은 386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사회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고 북한에 대한 환상이 사라진 지금까지도 主體사상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들일까요.

李東湖 한 번 형성된 역사관·철학·이데올로기는 심혈을 기울이지 않으면 고치기 어렵습니다. 정치권에 있는 386 가운데는 북한의 문제점을 인식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존의 인간관계·조직논리 등 때문에 자신의 思考에 대한 전면적인 再검토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主體사상을 신봉하고 있다기보다는, 1980년대 思考의 잔재가 남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姜吉模 여전히 북한 권력이 존재하고 있는 영향이 크다고 봅니다. 북한의 존재는 主思派의 확장과 再생산을 가능하게 해주는 物的 근거가 되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는 大腦(대뇌)하단부에 「主思 메모리칩」이 장착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회 「主思 메모리칩」이 뭡니까.

姜吉模 과거 主思派 활동가로서 체제전복운동에 가담했던 사람들에게는 「主思 메모리칩」이, 그 시기에 대학에 다니면서 가까이에서 그들을 지켜보았던 사람들이나 그들을 지켜보았던 선배들에게는 「다소 버전이 떨어지는 主思 메모리칩」이 장착되어 있다고 보면 됩니다.

  그렇다고 수령이나 북한에 대한 盲從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親北反美」라는 핵심 코드는 그의 생활 근거가 어떻게 바뀌든 살아남아 있다고 봅니다. 그들은 평소에는 韓美동맹을 바탕으로 발전한 대한민국의 전문직 종사자나 기득권층으로 살아 가면서도, 막상 思考할 때에는 「親北反美」 코드가 작동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는 이미 그들의 그런 思考를 받아 주는 「市場(시장)」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親北反美」 코드를 가지고 가면 대접받을 수 있는 대한민국이 됐다는 것이죠.

李東湖 사람에게는 자신의 젊은 시절 가지고 있던 철학과 가치관을 가급적이면 溫存(온존)하려는 저항력이 있습니다. 그럴만한 근거가 조금만 있으면 사람은 자기가 기왕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그대로 지니려고 하게 마련입니다.

  主思派에게는 북한이라는 근거가 있습니다. PD 출신 轉向者(전향자)보다 主思派 출신 전향자가 적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金大中 정권의 등장은 主思派에게 새로운 활동의 場을 제공했고, 그들이 확대 再생산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主思派=간첩조직」의 대중화

사회 북한과 접촉했나요.

姜吉模 우리는 시도는 했지만, 직접 접촉하지는 않았어요. 큰 상관은 없었습니다. 이미 韓民戰의 지도이념이 관철되는 운동체계는 그 자체로서 북한의 지도이념을 관철하는 것이었으니까요. 主思派 운동은 그 자체로서 곧 「간첩조직의 대중화」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으로서도 굳이 공작원을 파견해서 아날로그적으로 공작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회 이번 「386간첩단 사건」을 어떻게 보십니까.

姜吉模 우리가 활동하던 당시에도 운동출세주의자들 중에는 북한공작원들과 접촉하게 되면, 그것을 운동권內에서 자신의 위신을 높이는 로또에 당첨된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나왔어요.

  중부지역당 사건 관련자들 가운데는 「우리는 韓民戰의 지시를 받는 조직이다. 함께 일하자」고 하자, 「내가 그럴 자격이 있느냐」고 감격해하는 자들도 있었다고 하잖아요. 이 단계에 이르면 主思派 운동은 사회변동을 위해 북한의 이념과 노선을 받아들이는 정도를 넘어 운동 전체가 북한의 지령을 受領(수령)하는 「대중적 간첩조직」으로 변질된 것이죠.

  이런 풍조 때문에, 이번 386간첩단 사건의 장민호도 포섭대상을 찾기가 너무 쉬웠을 것입니다.

사회 과거 主思派 운동을 했던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李東湖 우리는 당시 「민주화운동」을 했던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말해 우리는 「사회주의 혁명운동」을 했던 것이고, 대한민국에 대해 반역을 했던 것입니다. 그걸 「민주화운동」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主思派에서 벗어난 후에는 당시의 잘못을 어떻게 갚을까를 고민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姜吉模 우리는 「위대한 수령 金日成 동지」를 찬양했고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말로는 조국과 민족을 위한 일이었지만, 그것은 「역사적 범죄」였습니다.

사회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해주시죠.

姜吉模 「主思 메모리칩」이 장착된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대한민국의 이익 보다 북한의 이익을 위해 복무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국가기밀을 빼내는 사람들만 간첩이 아닙니다. 북한권력의 이익을 위해 직·간접적으로 복무하는 자들이 바로 간첩입니다.

  간첩행위에 준하는 행위를 하는 자들이 대한민국의 主力집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과거 기준으로 조금 과장되게 표현한다면 대한민국은 이미 赤化(적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간첩 몇 사람 잡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국민운동 차원에서 일대 思想戰(사상전)을 벌여야 합니다. 「親北反美 코드」를 앞세워 대한민국의 성장동력을 갉아먹고 있는 세력들이 얼마나 위험한 세력인지를 국민들에게 고발하는 것이야말로 思想戰의 우선 과제입니다.


내년 大選은 「대한민국 세력 對 反대한민국」 세력의 싸움

李東湖 활동 영역을 잃고 궤멸 일보 직전까지 갔던 親北左派는 金大中-盧武鉉 정권 아래서 오히려 확대 再생산되고 있습니다. 2007년 大選에서 左派정권을 종식시키는 것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左派운동의 본질은 자신의 본질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들은 과거에는 스스로를 「민주화세력」·「개혁세력」으로 포장했고, 근래에는 「평화세력」이라는 위장 라벨을 붙이고 있습니다. 저들이야말로 守舊세력·反민주세력이고,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세력이라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내년 大選은 한나라당과 열린당의 싸움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선진강국으로 만들려는 사람들과 자신들을 민주화·개혁·평화세력으로 위장한 守舊·反민주·反대한민국 세력의 싸움이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右派연합전선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 합니다.●

  〈사회·정리 裵振榮 月刊朝鮮 기자〉

전향한 386은 극소수, 젊은 세대가 386권력 교체해야

[강길모, “전향한 386은 극소수, 젊은세대가 386권력 교체해야,” 미래한국, 2009. 5. 2. 12쪽; 인터넷미디어협회 회장.]

“내게 주사파 교육을 받고 김일성에게 충성 맹세한 운동권 출신들이 현 정권의 실세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2006년 10월은 여권과 재야인사 수명이 북한공작원과 접촉한 ‘일심회’ 사건이 터져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시기였다. 당시 강길모 인터넷미디어협회 회장은 이 발언으로 노무현정권에 대한 ‘색깔논쟁’에 불을 지피면서 일약 ‘386 저격수’로 부상했다.

강길모 회장은 ‘골수 386 운동권’ 출신이지만 90년대 전향한 이후 줄곧 386의 실체를 알리는 활동을 해오고 있다. <미래한국>은 ‘386의 도구’를 자처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권력비리혐의로 소환을 앞두고 있는 시점인 지난 4월 21일, 서울 중구 장충동에 위치한 인터넷미디어협회 사무실에서 강 회장을 만나 386세력의 현재와 미래 등에 대해 들어봤다. 

도식적인 친북반미가 386코드 강 회장은 연세대 신학과 82학번으로 전대협 결성을 주도한 반미청년회 출신이다.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은 80년대 학생운동의 지도부를 형성한 그룹이니 이를 결성한 반미청년회 일원이라면 운동권386 지도부 중에서도 핵심인 셈이다.

그는 미 문화원 점거투쟁과 KAL기 조작사건을 주도하기도 했으나 90년대 초 사회주의가 무너진 뒤 서서히 혁명이론을 접었고, 1995년경 철저한 ‘대한민국파’로 거듭났다. 현재는 인터넷미디어협회 제3기 회장, 우파 인터넷매체인 프리존뉴스 대표,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의 한나라당 추천 인사로 활동하고 있다.

강 회장은 386에 대한 얘기를 시작하면서 “전향한 386은 아직도 거의 없다”고 운을 뗐다. “20년 전에 주사파였던 사람들이 지금도 여전히 주사파냐 하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과거 주사파 활동을 했던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주사파적 뇌세포 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도식적인 친북반미 논리입니다. 주사파 출신들은 무조건적 반미, 습관화된 반미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미의식이 생활화된 신념 체계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죠.”

강 회장은 고등학교 시절 박목월 시인으로부터 ‘한국문단을 이끌어갈 기대주’로 평가받기도 했지만 김지하의 저항정신에 매료되면서 문학을 포기하게 됐다. 대학 입학 전 선배의 ‘꼬임’에 넘어가 운동권적 사고를 접하게 된 것. 세미나라는 이름으로 역사 공부를 했는데, ‘베트남 전쟁에 대한 새로운 해석’ 에 대한 내용들이 상당히 충격적이었다고 한다.

강 회장은 “처음에는 권력 저항에 대한 매력으로 시작했지만 점차 역사의 왜곡된 학습을 통해 미 제국주의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게 됐고 그러면서 사회주의 혁명만이 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강 회장은 당시 자신이 사회주의 혁명운동가이기 때문에 대학을 졸업하면 노동운동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985년 군대를 다녀온 이후 운동권 조직을 휩쓴 주사(主思)열풍을 접하게 되면서 진로를 바꿨다.

주사파는 김일성의 혁명사상을 자신들의 사회주의 혁명논리로 받아들인 이들이다. 강 회장은 주사파들이 북한의 직접적인 지령을 받았는지 여부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주사파들이 북한의 직접적인 지령을 받고 안 받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법적으로 단죄할 때에는 일심회처럼 북한과 커넥션이 있었느냐는 유력한 근거가 됩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주사파들이 ‘내재적 접근 방법’이라는 궤변을 가지고 북한을 이해하고 용인하고 있다는 겁니다. 노무현 정권 때 이들이 청와대를 장악했습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다소 과장된 표현일 수는 있지만 ‘대한민국이 적화된 것과 다름없다’는 얘기를 했었죠.”

주사파가 노무현 시절 청와대 장악

강 회장은 주사파 핵심 그룹이 그들의 사상적 외연을 확대하는데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운동권 용어로 주사파 출신들이 갖고 있는 사고에 전염된 사람들을 ‘우호적 대중’이라고 합니다. 우호적 대중은 미국적인 문화와 한미동맹에 기초해서 만들어진 대한민국 경제체제 아래서 살아가지만, 생각은 주사파들이 추구하는 이념과 가치체계에 우호적입니다.”

그는 최근 북한이 장거리 로켓을 쏘아올린 상황을 들어 설명을 이어갔다. “가수 신해철이 ‘약소국이 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유일한 방안은 핵을 보유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은 제국주의, 북한은 자주적 약소국이기 때문에 북한이 핵개발하는데 뭐가 문제냐. 이것이 신해철의 생각입니다. 신해철은 골수 386 구경도 못한 사람이지만, 주사파가 심고자 했던 반미코드가 자연스럽게 머리에 박혀 있는 거죠.”

강 회장은 문화․연예계에 진출한 386에 대해서도 말을 이었다. “일례로, 드라마 조강지처클럽에 출연한 탤런트 안내상(한원수 역)도 주사파 교육을 받은 친구입니다. 미 문화원에 사제폭탄을 던지라고 시켰더니 경비가 삼엄해서 대신 민정당사에 던지고 오다가 구속됐죠. 그 친구가 주사파적 신념체계를 갖고 있다고 보이진 않지만 본인이 주사파 활동을 재미 있어 했고, 의미 있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했죠.

그런 친구들이 문화계 연예계에 들어가 자기들끼리 밀어주고 끌어주고 한 거죠. 영화 쪽에서 명계남 씨는 주사파 교육을 제대로 받은 세대가 아닙니다. 그가 어울렸던 후배들이 주사파 잔당들이었죠. 결국 핵심적으로 ‘친북반미’로 거대한 네트워크가 형성되었고, 이 코드에 줄을 서야 출세할 수 있는 풍토가 만들어졌습니다.

반미청년회 활동 당시 강 회장이 지도했던 대상들은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사람이 많다. 노무현 정권 때 통일부 장관 후보로까지 거론된 오영식 전 민주당 의원, 노 대통령의 수행비서를 오래했던 여택수 전 대통령 제1부속실 행정관 등이 반미 청년회의 지도 대상이었다. 문용욱 전 청와대 제1부속실장, 이은희 전 제2부속실장 등도 반미청년회에서 지도했던 인물들이다. 당시 반미청년회는 각 캠퍼스별로 지도를 했는데, 안희정 현 민주당 최고위원이 반미청년회의 조직국장이었다.

강 회장은 정치학교를 개설해 핵심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학생들을 뽑아서 주체사상 교육을 시켰다. 대상은 85학번까지였다. 이외에도 김만수 전 청와대 대변인, 김○○ 전 청와대 부대변인 겸 행정관, 신○○ 전 청와대 행정관 등이 반미청년회의 간접 관리를 받았다. 반미청년회는 서대협(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을 조직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전대협을 만든 후 서총련․한총련으로 조직을 확대해 간다.

강 회장은 “이력서 뒤에 전대협 출신이라고 되어 있으면 백프로 주사파이거나 주사파 조직에 의해 지도․관리되던 인물”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17대 총선에서는 열우당 내에서 전대협 출신이 12명이었다. 보좌관까지 합하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고 전했다.
새 정부 들어서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외형상으로는 퇴조한 듯이 보이지만 여전히 386은 이념적 이슈가 생길 때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지금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물러난 사람도 많고, 지난 총선 때 거의 다 떨어졌어요. 원내에서는 많이 퇴조한 셈이죠. 그러나 이념적인 이슈가 떴다 하면 민주당은 여전히 한 목소리를 냅니다. ‘국가 보안법 폐지’, ‘PSI 참여는 미친 짓’ 이런 식이죠. 여전히 이념적 동질성이 강고합니다.”

“얼치기 주사파가 언론권력의 핵심”

강 회장은 노 전 대통령이 소환이 되더라도 386은 여전히 살아남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친노핵심 386들은 여전히 앞으로 갈 길을 모색 중입니다. ‘굿바이 노무현’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노무현에 기대서 기득권을 누려왔던 386들은 명분을 바꿔치고 얼마든지 재기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정치 감각이 뛰어납니다. 상황에 대한 분석능력, 기획력, 정치적 선전 선동에 있어서도 빼어난 역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회의원들이 보기에는 보좌관이나 참모로 쓰는 데 좋죠. 정치권 주변에서 생존하는 데 지장이 없습니다.”

청와대의 사정도 좋지 않다. ‘청와대에 진출했던 정치권 386중 나온 사람들이 있습니까. 이들이 알게 모르게 이명박 정부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정권 자체가 잘 인식을 못하고 있고, 좌파 정권에서 10년 생활했던 공무원들은 자연스럽게 친북반미 코드가 내장된 경우가 많아요. 그것을 정의라고 생각하고,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들이 먼저 나서서 법을 무시하고 정의를 무너뜨렸죠.“
강 회장은 “386세력들이 언론 권력을 뿌리 깊이 장악하고 있다”고 면서 “KBS, MBC 사장을 바꾼다고 좌편향적인 방송이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얼치기 주사파들이 언론권력의 핵심”이라고 지목했다.

“우호적 대중, 이 얼치기 주사파가 더 무서운 거예요. 공부라도 제대로 해서 자기 공부가 틀렸는지 안 틀렸는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으면 전향을 하는 거예요. 하지만 얼치기 주사파들은 ‘북한 좋아, 미국 싫어’ 이런 식으로 감상적으로 접근을 해요. 미국에 대해 저항하는 것이 정의롭다고 착각하는 것이 문제예요. 정권이 바뀌었지만 이런 얼치기들이 방송 권력에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강 회장은 “386이 ‘시대의 섬’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작년에 중소기업 사장하는 친구에게서 촛불집회에 간다고 전화가 왔습니다. ‘야 이놈아. 그런데 가면 안 된다’고 했더니 그 친구가 ‘재밌잖아’하는 거예요. 과거 대학 시절에 들었던 게 정서적으로 와닿기 때문입니다. 이 자체가 크게 변화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386 집단의 중심은 많이 약화되고, 생각이 연해질 겁니다. 이 섬이 퇴출되려면 10-20년이 걸릴 겁니다. 비관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지금 386문제는 포스트 386이 해결해 줘야 한다고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그는 “지난해 6월 촛불 광풍에서 봤듯이 얼치기 범좌파 성향의 흐름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강력한 메인스트림[주류]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건강한 방향으로 포스트 386들에게 문화적 흐름을 만들어 줄 수 있는가가 고민이고 과제”라고 했다. 강 회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위대성’을 믿고 있었다.

“국민들이 노무현을 선택한 것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많은 각성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우리 386세대는 윗세대 어르신들이 피땀 흘려 이루어놓은 것을 노력 없이 누려왔습니다. 저는 잘못된 선택조차도 대한민국이 보다 건강해지고 전진하게 만드는 동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이상적으로 보는 것 같지만 좌파 문화적 코드가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상황에서도 포스트 386들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주자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강 회장은 4년 전 보수 인터넷신문인 프리존뉴스를 창간했다. 정권이 바뀐 이후 할 일이 줄어들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많아졌다고 한다.

“우리가 대한민국 주인, MB정부 비판보다 격려를”

“대한민국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는 우파에게는 더 중요하고 할 일이 많습니다. 지금은 권력이 우리에게 있는데 따지고 보면 알맹이가 하나도 없는 상황이에요. 이렇게 가다보면 우리가 기대했던 대한민국의 제자리 찾기는 더 어려워질 수 있는 미묘한 상황이라고 봐요. 상황을 제대로 짚고 정리해가면서 목표한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지금이 더 어렵고 힘든 시기입니다. 경제적으로도 지난 좌파정권 때 보다 더 어렵습니다. 노 정부 때는 적극적인 후원자들이 많았습니다. 애국 우파들에게는 피 끓는 가슴만 있지 좌파 매체들이 통일 마라톤 해서 돈 번 것처럼 뭐 만들어 먹는 재주는 없어요.”

강 회장은 애국 우파들이 이명박 정부를 어떻게 도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저는 애국 우파들이 이명박 정부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것을 말리는 편입니다. 기대했던 수준보다 떨어진다고 불평한다면 득이 될 것이 없습니다. 어떻게 도와줄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어른도 우리고 주인도 우리입니다. 자꾸 안 도와준다고 떼쓰면 우리 운동은 더 위축되고 국가적인 미래가 어두워진다고 봅니다. 현 정부가 잘 하도록 유도하고 격려해가면서 가야지, 우리마저 저 사람들을 몰아세우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맨주먹 붉은 피’라도 전진해야 한다는 강 회장에게 포스트 386을 묶을 수 있는 아이템에 대해 물었다. “눈을 밖으로 돌려야 합니다. 프론티어정신․진취성․적극성 등을 국가와 사회 공동체의 핵심적인 과제로 했으면 좋겠는데, 미디어 권력 자체가 좌파적 코드에 장악되나 보니 진취성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여전히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우물 안 개구리처럼 모든 문제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게임이라고 보고 있어요. 청년 실업은 구조적인 실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질 좋은 일자리가 없는 거죠. 국비유학생을 매년 10만명 해외로 보내자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2조원이면 1년에 10만명 정도를 외국으로 보낼 수 있습니다. 중국은 이런 방식을 써서 실리콘 밸리를 장악했습니다.”

현재 그는 인터넷미디어협회 3기 회장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인터넷미디어협회는 좌파 매체들이 모여 있는 ‘인터넷신문협회’에 대항하는 조직입니다. 더불어 보수우파에 대단히 부정적인 포털에 대항하기 위해서 만들어졌죠. 현재 네이버의 메인 화면에 뜨는 뉴스캐스트에는 보수 우파 인터넷 신문이 하나도 없어요.”

마지막으로 강 회장에게 주사파가 되기 전 기독청년운동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 요즘도 교회에 다니냐고 물어봤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강 회장은 대한민국에는 돌아온 탕자이지만, 교회에는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고 했다.

종북세력,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나?

김성욱 (리버티 헤럴드 대표)

남북한은 이미 체제경쟁의 의미를 잃은 지 오래다. 40배 가까운 GDP 격차는 물론 참혹한 인권유린은 북한이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인간생지옥’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그러나 한국사회에는 종북주의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번지고 있다. 연봉 1억원이 넘는, 세계유수의 항공사 기장이 종북놀음을 하다가 적발되고 인터넷 상에선 김일성, 김정일 만세를 외치는 블로그가 만들어진다. 대체 무슨 일일까?

간첩 통일애국열사묘 조성후 “미제 점령지에 모셔 죄송…”

종북세력은 주한미군철수,국가보안법철폐,연방제통일과 같은 북한의 대남노선을 따르는 것을 물론 사사건건 북한의 정권을 편드는 이들로 정의할 수 있다. 이들의 뿌리는 6.25사변 당시 남한에서 살아남는 빨치산,남로당 출신과 그 후예들로 거슬러간다. 한국은 자유로운 사회이다. 전쟁이 끝난뒤 전향을 거부한 이들도 처벌의 한계가 있었고 상당수는 체제불만 세력으로 남았다. 그들은 자신의 사상적 조국을 소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보았고 6.25사변 역시 조국이 친일.친미,사대매국노에 패한 한 서린 치욕으로 기억했다.그래서 그들은 남한에 빨치산.남로당 묘역을 만들고 거창한 추모에 나선곤 했다.

2005년 5월 27일 경기도 파주 보광사에서 소위 ‘통일애국열사모역’이 조성돼 기념식이 열렸다. 이 묘역은 6.25 당시 빨치산,남로당 출신과 간첩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것이다. 당신 범민련 남측본부라는 단체의 이종린 명예의장은 이렇게 말했다. “경기도 보광사 이 땅은 미제국주의가 점령하고 있는 점령지인데, 우리가 동지들을 이곳에 모셔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반드시 진정한 우리 조국 땅에 모실수 있도록 하겠다.(인터넷매채 오마이뉴스 보도)” 스스로 말했듯 북한이 ‘진정한 우리 조국 땅’, 한국은 ‘미제국주의가 점령한고 있는 점령지’라는 것이다.

당 찬건 60년 맞아 북으로 가자

같은 날 전북 순창군 희문산 인군에서 소위 “남녁 통일애국열사 추모제”가 열렸다. ‘남녁 통일애국열사’ 역시 빨치산,남로당과 간첩 출신으로 사망한 자를 말한다. 이 행사에 참석한 소위 시위단체 참석자들은 6.25 당시 빨치산의 투쟁정신을 이어받아 미국제국주의를 몰아낼 것을 다짐했다. 통일연대 대표의장 한상렬은 “이 행사는 일본,미국제국주의자를 몰아내고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통일해 나가는데 밑뿌리이신 통일애국열사들을 기억하는 자리”라고 주장했다. 한상렬은 2010년 입북,천안함 폭침의 원흥이 이명박이라는 주장을 했던 인물이다. 경남지역 빨치산 출신 박순자는 “죽은 동지들은 외세를 반대해 투쟁했다”며 “해방 60돌,당창건 60돌, 6.15 5돌인 올해 우리는 손에 손을 잡고 북으로 간다. 통일은 다 됐다”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당은 물론 북한의 조선로동당이다.

주사파 이념을 가지고 고시를 봐라!

종북세력은 80년대 대학가에 주체사상파(이하 주사파)가 나오며 수족으로 질적으로 팽창한다. 386주사파는 학생운동에서 노동,농민,빈민운동 등 사회에 진출할 이들을 위해서 ‘투신팀’을 운영했다. 당시 운동권 출신은 “주사파 이념을 가지고 교사가 되고 교수가 되고 고시를 보고 심지어 군인이 되라고까지 교육했다.”고 말한다. 말 그대로 ‘그’ 이념을 가지고 ‘각’ 영역에 투신하라 했다는 것이다. 반한,반미,친북에 경도된 386주사파는 각 영역에 투신해 성장해 간다. 사회에 적응해 살면서 과거의 극단적 이념을 버리기도 했지만 좌파적 쏠림은 바뀌지 않았다. 이들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며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한국 주류사회에 편입해 갔다. 노무현 정권 당시 가장 큰 인맥으로 불리었던 ‘전국대학생총연합회(전대협)’ 역시 주사파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87년 결성된 대학생 조직인 전대협은 공식적으로 주한민국철수, 국가보안법철폐, 연방제통일이라는 북한의 대남노선을 주장했다. 그러나 전대협의 실제 모습을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국가안전기획부의 전대협 수사결과를 담고 있는 ‘주사파에 장악된 전대협의 실체수사결과’, ‘전대협 유인물과 북한방송 대비분석’, ‘전대협은 순수학생운동조직인가’, ‘전대협의 조직실체’ 등 복수의 공안문건들은 주사파 지하조직의 전대협 장악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이날 기록은 “전대협이 1987년과 1988년 ‘전국사상투쟁위원회(전사투위)’와 ‘반미청년회’의 배후조조을 받은 데 이어 1989~1990년에는 ‘자주,민주,통일그룹(자민통)’의 배후조종을 받아왔고, 1991년 이후에는 “반제청년동맹’, ‘조통그룹’ 등 주사파 지하조직에 장악돼었다.”며 “전대협은 항상 김일성과 한민전(북한의 대남선전매체 ‘한국민족민주전선’의 약자)을 추종하는 지하혁명 조직에 의해 움직여 왔다”고 적고 있다.

“김일성 수령님 만세!” 충성 맹세했다는 기록

이들 기록은 전대협 내부에서 김일성에 대한 충성의식도 행해졌다고 적고 있다. 예컨대 한00라는 전대협 조통위 위원장의 자술서 등에 의하면 “1991년 4월 하순 경희대 총학생회실에서 전대협 조통위 정책실장 손00 주재로 개최된 정책주체전국회의(전대협 정책실원 5명과 전대협 지구 조통위 실무자 11명 참석) 후 참석자 전원이 “김일성 주석의 건강을 위하여”라고 건배한 후 “김얼성 수령님 만세” 삼창 후 회의를 종료하는 등 전대협 간부들이 회의,집회,시위, MT후 김일성에 대한 충성의식을 행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 전대협을 장악한 주사파 지하조직 중 하나인 자민통은 1990년 8월 중순 한탄강 소재 민박촌에서 각 대학 총학생회장 등에 출마한 88학번 6명(한00, 최00, 천00, 강00, 박00)과의 MT에서 김일성에 대한 충성맹세를 했던 것으로 나온다.  자민통 조직원들이 당시 “김일성 수령님 만세! 김정일 지도자 동지 만세! 한국민족민주전선 만세!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만세”를 부른 후 선언했던 결의문과 맹세문은 아래와 갔다.  “위대한 수령님 김일성 동지와 우리의 지도자 김정일 비서의 만수무강과 한민전의 영도 아래 이 한 목숨 끊어질 때까지 투쟁하겠다는 결의 결단으로 나아가자(강령 중)…위대한 수령 김일성 장군님을 따라 숨통이 끊어지는 그날까지 죽음으로 혁명을 사수하며 조국과 민족이 완전히 해방되는 그날까지 열사 헌신하겠습니다.(규약 중)”

“김일성을 존경한다” 반본

전대협 간부들의 김일성에 대한 강한 충성심은 1991년 전대협 수사과정에도 드러났다. 당시 수사결과에 따르면 제0기 전대협 의장 S씨는 “김일성을 존경한다”는 말을 반복했고, “김일성이 TV화면에 비칠 때면 건강하고 정정한 모습에 흐뭇함을 느낀다. 북한은 정의와 자주권이 보장되고 있는 한반도의 유일한 정통정부이고 북한에 의한 통일만이 진정한 조국통일이다”라고 주장했다. 제 0기 전대협 의장 K씨는 “김일성 주석을 핵심으로 하는 수령관에 동의한다.”고 말하는가 하면 “김일성주석은 항일독립투쟁을 전개했고 더 나은 사회주의발전을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 지금의 북한을 훌륭하게 건설했다. 북한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정치적 자주,경제적 자립, 군사적 지위를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나라”라고 주장했다.

“위수김동, 친지김동” 김일성, 김정일 찬양

전대협의 주체사상은 추종은 전향 주사파 지식인들에 의해서도 잇따라 제기돼왔다. ‘반제청년동맹’ 등에서 활동한 홍진표 씨는 “1980년대 이후 학생운동지도부는 주사파가 장악했다. ‘주사파는 극소수 학생만이 추종했던 이념’ 이라는 전대협 출신들의 거짓말”이라며 2004년 10월 <월간조선> 기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사파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전대협, 한총련 등을 조직해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들은 소위 김일성 원전을 읽고 한민전을 청취하며 북한 주도의 통일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했다. 주사파는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친지김동(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이라는 호칭을 써가며 김일성과 김정일을 진심으로 추앙했다.” 주사파에서 전향한 <시대정신> 편집위원 최홍재 씨는 ‘잃어버린 세대 386’이라는 논문에서 “4.19세대와 1970년대 민주화운동세력은 민주화 자체가 목적이념인 반면 386에게 민주화는 사회주의나 북한의 통일로 가는 과정에 불과했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은 사회주의 운동이었다.”며 이렇게 지적했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을 경과하며 주사파 NL그룹이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대표적인 사회운동도 이런 입장을 지니게 된다. 주사파는 대중조직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며서 전대협(1987년)과 한총련(1993년)을 조직하게 되어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1990년을 전후하여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이 연쇄적으로 붕귀하면서 PD그룹은 급격하게 쇠락하게 된다”

“전대협을 주사파가 장악한 게 아니라 주사파가 전대협을 만들어”

전대협 연대 사업국장(연사국장) 출신으로 주사파에서 전향한 이동호 북한민주화포럼 사무국장은 “전대협이 북한의 주체사상을 추종했으며, 한민전의 투쟁방침을 따랐다는 사실은 의심할 나위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주체사상으로 무장한 학생운동그룹은 1987년 ‘반미청년회’, ‘조국통일그룹’, ‘관악자주파’등을 결성했고, 이 과정에서 1987년 6월 항쟁의 성과를 바탕으로 같은 해 8월 전대협을 건설했다. 전대협을 통해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반미청년회’ 등은 모두 한민전 지침아래 주체사상과 북한식 투쟁노선으로 무장했다. ‘반미청년회’ 등은 자파 출신을 총학생회장에 당선시키거나 활동가를 전대협 내부에 침투시켜 자신들의 지도를 관철시켜왔다. 대중조직인 전대협은 합법조직을 지향, 사싱이나 투쟁노선을 대중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전대협은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그룹에 의해서 지도됐기 때문에 그들의 노선과 자료 등은 곳곳에서 주체사상과 투쟁노선이 나타나 있다. 반미청년회 핵심맹원이었단 강길모 프리존 미디어 편집인은 “전대협은 주사파에 장악됐던 것이 아니라 주사파가 만든 것이 전대협이며, 주사파가 아닌 전대협 간부는 없었다고 보는것이 정확한 표현”이라고 말했다. 그는 9월 20일 서울프레스센터 자유민주주의학회 세미나, 2006년 12월 <월간조선> 등을 통해 열린우리당 내 주사파 출신 정치인들을 거명하기도 했다.

“김일성주의 조직이었던 반미청년회 등이 1987년 만들었던 것이 전대협이다. 현재는 노무현 정권 실세 역할을 하고 있는 많은 정치인들이 내가 속한 조직에서 교양됐다. 전대협 출신 열린우리당 의원 우상호, 오영식씨, 청와대  제1부속실장 문용옥씨, 전 제2부속실장 이은희씨, 전 청와대 대변인 김만수씨, 전 청와대 제1부속실 행정관 여택수 씨 등, 우리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찬양했다. 그는 또 이렇게 증언했다. “경험에 비추어 볼때 과거 공안사건은 99.9% 사실앋. 하지만 수사기관이 증거가 아닌 자백에 의존하려다 보니 고문이나 가혹행위가 번번하게 이뤄졌고, 이것이 ‘조작설’의 빌미가 되곤 했다. 주사파 운동권에서 북한 공작원을 만나는 일은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북과 직접 커넥션이 있다는 것은 운동권 내에서 자신의 권위와 서열을 단번에 높여주는 계기가 됐다”  전대협 출신으 노무현 정권 당시 새로운 권력집단으로 부상했다. 당신 집권당인 열린우리당 내에서 12명의 국회의원(1기:이인영,김태호,우상호,이철우 전의원 2기 : 오영식, 백원우, 정청래, 최재성, , 3기 : 임종석, 이기우, 한병도, 복기왕 전 의원) 이외에도 이재경 원내공부실장과 20여 명의 의원보좌관 등 곳곳에 전대협 출신이 포진해 있었다.

종북세력의 핵 민노당

80년대 형성된 종북세력은 이제 제도권 내에서 강력한 진지를 구축하고 있다. 그 핵은 단연 민노당이다. 민노당은 2010년 천안함, 연평도, 3대세습과정에서 자신의 실체를 여과 없이 드러냈었다. 민노당의 이적성은 ‘민중민주주의’를 골간으로 한 강령에 명백히 나와있다. 강령은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농민 등 민주으이 힘과 지혜를 모아 일하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열어 갈것” ,”진보적 민주주의가 이 땅에 구현되지 않는 한 민중의 삶은 억압과 수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에 민주노동당은 민중이 참 주인이 되는 진보적 민주주의 체제를 건설할 것”, 이라며 “민중주권을 실현, 민중권력을 구축하여 새 세상을 향해 전진할 것:이라고 규정한다. ‘민중민주주의’는 대한민국 헌법의 ‘국민주권주의’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쉽게 말해 모든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것이 ‘국민주권’이고 농민,노동자, 도시번민 등 민중이라는 특정계층, 특정계급만 나라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 소위 ‘민중주권’이다. 북한이 말하는 ‘인민주권’ 역시 특정계층, 특정계급만 주인이 된다는것으로 ‘민중주권’과 같다. 북한헌법 제4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권은 로동자,농민,군인,근로인테리를 비롯한 근로인민에게 있다”고 하며 로동법8조는 “국가는 착취와 압박에서 해방되어 국가와 사회주의 주인으로 된 로동자,농민,근로인테리를 비롯한 근로인민의 리익을 옹호하며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한다.”고 규정한다. 이상의 내용은 로동자,농민,군인, 근로인테리가 아닌 소위 부르주아,기득권층은 주권도 없고 인권도 없다는 무시무시한 규정이다.

북한 고려연방제 따라가는 민노당

민주노동당의 통일정첵 역시 위헌적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 4조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유일한 합헌적,합법적 통일원칙으로 천명하고 있다. 반면 민노당은 “외세의 부당한 간섭이나 개입을 반대하고, 우리 민족의 주체적 힘에 의한 자주적 평화통일을 지향한다. 흡수통일의 방식이 아닌 연방제 방식의 통일을 지향한다. 한미군사동맹체제를 해체하고 주한민국을 철수시킨다”등을 주장한다. 민노당 강령과 북한의 주장을 비교해보자. 북한의 대남적화방은을 담은 자료집인 ‘주체사상에 기초한 남조선 혁명과 조국통일이론’에 따르면 북한의 대남적화전략이 “미제국주의 침략에 의하여 민족분단의 비극이 발생하였고, 따라서 남조선(대한민국)은 미제국주의 식민지라는 전제아래, 통일을 위해서는 먼저 주한미군을 철수시켜 민족을 해방시킨 다음, 남조선정부를 타도하여 인민민주주의 정부를 세우고, 남북의 인민정부끼리 연방제 통일을 이룩한다”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에 따르면 민노당 강령에 나타난 통일정책 내용은 북한의 대남적화통일방안인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전략(NLPDR)’ 및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의 내용들이라는 사실이 금방 드러난다. 민노당 강령의 통일정책은 헌법이 명령하는 자유민주통일 원칙에 의한 명백한 위반이 된다는 말이다. 민노당의 2011년 7월 개정 이전 강령을 보면 민노당의 반역성이 더욱 분명해진다. 2000년 1월 29일 창당대의원대회에서 제정된 강령은 “인류사에 면면히 이어져 온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을 계승 발전시켜 새로운 해방공동체를 구현할것 노동해방, 인간해방의 사회주의적 가치를 계승할것,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 모든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평등과 해방의 새 세상으로 전진 해 나갈것”은 물론 “총수일족의 지분 강제로 유상 환수 해 재벌 해체 농지와 소규모 생활터전용소유지를 제외한 일정 규모이상의 토지 국가공유 농기계를 공동으로 쓰고 토지 집단이용, 노동자, 농민등 민중대표를 중심으로 정부와 기업대표가 참여하는 ‘경제정책위원회’가 국민경제를 기획하고 조절’ 등 헌법의 시장경제원칙을 부정한다.

민노당의 구체적 활동도 헌법이 수용 할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다. 예컨대 민노당 권영길 대선후보는 17대 노선 당시 이른바 ‘코리아 연방공화국 건설’을 국가비전으로 내세우며, 국가보안법 철폐, 한매동맹 해체, 주한미군 철수 등을 주장했다. 코리아 연방이란 용어는 북한이 주장하는 고려연방 중 ‘고려’를 ‘코리아’로 바꿔 놓을 뿐 이라는 점에서 북한의 대남전략에 노골적으로 동조하는 모양새이다.

종북 청산 여부가 자유통일 관건

종북주의가 만연하고 발호하는 이유는 김정일 정권의 운명과 직결돼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망해가고, 끝나가는 북한정권, 도저히 희생 가능성이 없는 북한정권이 천안함, 연평도, 3대세습 같은 마지막 발악에 나서자 종부주의 역시 선을 넘고 있다는 해석이다. 그런 면에서 한반도 상황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운명을 건 시소게임이 벌어지는 모양새다. 한쪽은 북한정권이 끝나고 남한 내 종북세력 역시 약화,소멸의 길로 가는 길이고 다른한편은 남한 내 종북세력이 강화돼 북한정권이 연장되고 한반도 전체가 연방제 국면에 들어가는 길이다. 만일 2012년 총선에서 민노당이 원내교섭단체를 만들거나,대선에서 좌파연합이 재집권한다면 대한민국은 후자의 길로 접어들 가는성이 많다. 분명한 것은 국민이 후자의 깃발을 따를 때 북한의 해방과 구원, 자유통일은 요원한 일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한반도의 결정적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다.

출처 : 월간 지저스아미 (에스도기도본부)

VON뉴스 김미영 대표, ‘기독교 내 종북 주사파’ 저격

“김용민 씨, 교회 개혁 말하며 가짜 불러들이는 이단”기독일보 송경호 기자+-

‘주사파 對 기독교’ ‘종북 기독교 對 순수 기독교’ 싸움 알아야
김용민 씨 편집장 역임 뉴스앤조이, 공산주의 연장선서 탄생
北에 종교 자유 있다는 건 이단… 이단이 어떻게 교회 개혁?
맑스 레닌주의와 같은 폭력, 교회 바꾸는 도구로 써선 안 돼김미영 대표. ⓒVON뉴스 영상 캡쳐김미영 대표. ⓒVON뉴스 영상 캡쳐

VON뉴스 김미영 대표(전환기정의연구원 원장)가 최근 유튜브 강의를 통해 기독교 내 종북 주사파 세력들의 실체를 고발하며 김용민 씨(평화나무 이사장)와 뉴스앤조이(뉴조)를 ‘저격’했다. 김 대표의 이 같은 비판에 대해 김용민 씨 등이 어떻게 대응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김 대표는 며칠 전 김용민 씨가 몇몇 목회자들을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한 것을 언급하며 말문을 열었다. 김 대표는 “흔히 주사파라고 하면 80년대에 대학 다닌 사람들만 생각하지만, 지금 제가 말하고자 하는 이들은 친북 정치세력을 만든 이들”이라며 “이들은 보수·민주·종북 세 그룹으로 재편돼 아무도 전향하지 않고 한국 최대 정치 세력으로 성장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의 정치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사파와 기독교, 종북 기독교와 순수한 기독교 사이의 싸움을 알아야 한다면서, 김용민 씨가 편집장을 역임한 바 있는 뉴스앤조이(뉴조)의 주사파 및 종북 성향에 대해 지적했다.

뉴조는 아름다운마을이라는 이름의 공동체와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었는데, 해당 공동체는 대담하면서도 노골적으로 주체사상 및 북한의 체제에 대해 찬양 및 고무하는 활동을 했던 곳이었다.

이 같은 내용에 대해서는 본지가 이미 “뉴스앤조이, ‘주사파가 교계에 심은 셀조직’ 논란“이라는 제목의 기사 등에서 고발했고, 뉴조 측은 이에 대해 납득할 만한 공식적 입장 표명을 전혀 하지 못하다가 뒤늦게 본지를 고소했으나 검찰은 이를 혐의 없음으로 불기소했다.

주재일 씨가 쓴 글의 일부. “뉴스앤조이가 우리 공동체를 비롯한 교회 내부의 개혁 세력의 전위조직으로, 선동조직으로 건실하게 서도록 활동할 것”이라고 적고 있다.

김미영 대표는 특히 뉴조 전 편집국장 주재일 씨가 아름다운마을 카페에 올린 글에서 “뉴스앤조이가 우리 공동체를 비롯한 교회 내부의 개혁 세력의 전위조직으로, 선동조직으로 건실하게 서도록 활동할 것”이라는 글을 썼던 사실을 들어 “80년대 학생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의 연장선에서 탄생한 것이 뉴조와 같은 매체”라며 “저는 기독교 영역에 공산주의라는 이단이 들어왔다고 생각한다. 혁명조직 같은 말들은 전부 맑스 레닌주의 공산주의 주체사상에서 온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들은 자신도 하나님을 믿고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데, 김일성과 김정일을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신앙적·영적 감수성의 문제”라며 “이런 것이 논쟁으로 해결될까? 김용민과 김용옥 등은 논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 시대는 특히 기독교 영역이 이런 세력에 잠식됐다”고 했다.

그는 또 뉴조가 북한에 종교의 자유가 있다는 보도를 했다며 이를 반박하는 내용의 영상을 보여준 뒤, “북한에서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자들은 김일성을 하나님으로 믿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 이게 교회 맞느냐. 이것은 이단이다. 이단 세력이 어떻게 기존 교회를 개혁한다는 말이냐. 그런데 (이런 뉴조에) 한국교회가 엄청난 돈을 냈다”며 뉴조가 한빛누리재단(이사장 김형국 목사)을 통해 2014-2017년 4년간 10억원 이상의 후원을 받았다고 했다.김미영 대표는 “외국의 한 다큐에서 북한의 교회 전도사와 인터뷰한 내용”이라면서 이 영상을 보여줬다. ⓒVON뉴스 영상 캡쳐김미영 대표는 “외국의 한 다큐에서 북한의 교회 전도사와 인터뷰한 내용”이라면서 이 영상을 보여줬다. ⓒVON뉴스 영상 캡쳐김미영 대표는 “외국의 한 다큐에서 북한의 교회 전도사와 인터뷰한 내용”이라면서 이 영상을 보여줬다. ⓒVON뉴스 영상 캡쳐김미영 대표는 “외국의 한 다큐에서 북한의 교회 전도사와 인터뷰한 내용”이라면서 이 영상을 보여줬다. ⓒVON뉴스 영상 캡쳐

그는 “김용옥·김용민 씨는 이런 게 괜찮다면서 우리에게 ‘극우’라고 한다”며 “그런 사람이 정치까지 하겠다고 하고, 훌륭한 목사님들을 고발도 한다. 이런 상황이 괜찮다는 사람은 계속 그렇게 살아라. 하지만 그러다간 우리 모두 죽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신천지나 통일교와 비교도 안 되는 이단이 한국교회를 집어삼켰다고 생각한다”며 “명망 있는 기독교 목사님들, 이제 이것을 들여다 봐야 하지 않겠느냐. 인간을 신으로 섬기는 주체사상이 기독교에서 허용되는 것이 맞느냐”고 물었다.

그는 “주사파들은 김일성 동상을 북한에 계속 세워 두고도 통일과 교류가 가능하다고 착각하는데, 기독교에도 이 착각에 빠진 이들이 있다”며 “그러나 한쪽은 계속 살아남을 수 없는 가치체계를 가진 나라이고, 다른 한쪽은 세계 보편의 기준에서 문제 없는 좋은 가치에 입각해서 만든 좋은 나라다. 이 나라는 이승만의 나라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기본권을 가진 진짜 주인들의 나라”라고 했다.

그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은 인류 역사상 가장 악한 반인도범죄자다. 히틀러보다 더 악하다”며 “2014년 유엔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권조사위 보고서를 통해 이들을 반인도·학살·침략범죄자로 정했다. 거기 참여한 분들은 북한의 참혹한 현실에 눈물로 그 작업을 했다고 한다”고 했다.

그는 결론적으로 “과연 김용민 같은 사람을 기독교인이라 할 수 있느냐”며 “소위 좌파 진보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들은 무한정한 이웃 사랑을 주장한다. 그런데 이웃만 사랑하면, 하나님 사랑과 거룩이 사라진다”고 했다.

그는 “맑스 레닌주의와 같은 폭력을 교회를 바꾸는 데 도구로 써서는 안 된다. 교회 개혁이 어떻고 사회 개혁이 어떻고 하면서, 진정으로 이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십자가가 아닌, 가짜들을 불러들이는 이단·사이비 기독교, 당신들이 지금 이 시대 위대한 부흥사들을 단죄할 자격이 있느냐”며 “저는 이 시대의 주사파와 사이비 기독교를 물리치고 북한 사람들 하나하나도 신앙의 자유와 먹고 살 자유가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선포할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김용민 씨 등을 비롯해 아직도 전향 못한 주사파들을 향해 “김일성이 정말 이 민족의 구원자인가? 아니다. 악마다. 반성하고 돌아오라”며 “이제 이 거룩한 나라를 더러운 주사파와 사이비에게 다시 뺏길 수 없다”고 했다.

주사파가 만든 反기독언론 뉴스앤조이 즉시 폐간하라”…교회수호결사대 기자회견

  •  양연희 기자
  •  최초승인 2018.12.18 15:41:27
한수대는 18일 뉴스앤조이의 해체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한수대는 18일 뉴스앤조이의 해체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현직 목사 등 기독교인들로 구성된 한국교회수호결사대(한수대)는 18일 오전 서울시 중구 뉴스앤조이(이하 뉴조) 사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뉴조는 주사파가 만든 위장 기독교언론일 혐의가 깊다”며 “한국교회 파괴 공작을 펴온 반(反)기독교 언론 뉴조는 폐간하라”고 촉구했다.

한수대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최근 기독교 전문 인터넷 매체 크리스천 투데이가 뉴조 기자와 직원들이 주사파와 관련돼 있으며, 영리기업임에도 불구하고 비영리 기관인 것처럼 위장해 후원금을 받아왔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에 대해 “매우 충격적이고 경악할 일”이라며 “이는 한국교회를 집요하게 공격해온 뉴조의 행적과 배치되는 이율배반적 행동이며 후안무치한 일”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어 “지금까지 뉴조는 도저히 기독교언론사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반기독교적이고, 다원주의적이며, 노골적으로 한국교회 죽이기로 일관한 기사들로 넘쳐난다”며 “성경이 금하는 동성애를 옹호하고 이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과 기독교단체들을 혐오세력과 극우보수세력으로 매도해왔고, IS와 이슬람에 대해 일방적으로 비호하는 기사를 남발해왔다”고 지적했다.

또한 “심지어 퀴어신학을 신봉해 예장합신교단과 예장통합교단, 예장백석대신교단으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된 임보라 목사를 비호하는 기사를 수없이 양산해왔다”며 “이는 명백히 뉴조가 임보라 목사처럼 퀴어신학을 신봉하는 언론사이고, 친이슬람적이며, 극좌사상에 경도된 언론사임을 자인한 셈”이라고 했다.

한수대는 “일반 언론도 아닌 기독교언론이라 자처하는 뉴조가 천부인권을 부여받은 우리 동포와 납치된 대한민국 국민들이 인권유린당하고 있는 끔찍한 현실엔 눈감은 채 오직 동성애와 가짜난민들 입장만을 대변하고 있다니 통탄스럽다”며 “뉴조는 이러고도 기독교언론사로 자처해왔으니 전형적 양두구육(羊頭狗肉)의 위선적 행태며, 양가죽을 쓴 이리의 모습이기에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뉴조에 ▲즉각 잘못을 사과하고 폐간할 것 ▲‘기독언론사’ 타이틀을 삭제할 것 ▲재정을 공개할 것을 촉구했다.

또한 검찰에 영리회사이면서 비영리 NGO로 가장해 후원금 모집하고, 한빛누리재단 통해 탈세 자행해온 뉴조에 대해 즉각 수사할 것을 촉구했다.

한국교회와 후원교회들에겐 반기독교언론 뉴조에 대한 재정후원을 즉시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양연희 기자 yeonhee@pennmike.com

다음은 한수대 성명 전문(全文).

한국교회를 파괴하는 공작 펴온 반기독교 언론 뉴스앤조이는 폐간하라!

지난 10월 23일 한국교회수호결사대는 뉴스앤조이(약칭 뉴조)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면서 “뉴스앤조이는 한겨레와 함께 한국교회를 향해 가짜뉴스 프레임 씌우기를 즉각 중지하라!”는 성명을 발표했었다. 그로부터 2달이 지난 오늘 우리는 뉴스앤조이와 관련된 충격적인 진실이 속속 드러나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기독교언론사라고 자처해온 뉴스앤조이에 지금껏 반기독교언론임을 의심하는 기사들로 넘쳐났지만, 한 발 더 나아가 실제 기독교를 파괴하는 공작을 펼쳐왔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크리스천투데이의 보도에 의하면, 지금껏 뉴조의 직원들이 주사파와 관련돼 있다고 한다. 이는 매우 충격적이고 경악할 일이다. 더욱이 뉴조는 영리기업임에도 한빛누리재단을 통해 비영리기관인 것처럼 위장해 후원금을 받아왔다고 한다. 이는 한국교회를 집요하게 공격해온 뉴조의 행적과 배치되는 이율배반적 행동이며 후안무치한 일이다.

지금까지 뉴스앤조이에 보도된 기사를 검색해보면, 도저히 기독교언론사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반기독교적이며, 다원주의적이며, 노골적 한국교회 죽이기로 일관한 기사들로 넘쳐남을 볼 수 있다. 성경이 금하는 동성애에 대해 옹호하고 이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과 기독교단체들을 혐오세력과 극우보수세력으로 매도해왔고, IS와 이슬람에 대해 일방적으로 비호하는 기사를 남발해왔다.

심지어 퀴어신학을 신봉해 예장합신교단과 예장통합교단, 예장백석대신교단으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된 임보라 목사를 비호하는 기사를 수없이 양산해왔다. 이는 명백히 뉴스앤조이가 임보라 목사처럼 퀴어신학을 신봉하는 언론사이고, 친이슬람적이며, 극좌사상에 경도된 언론사임을 자인한 셈이다. 이러고도 기독교언론사로 자처해왔으니 전형적 양두구육(羊頭狗肉)의 위선적 행태며, 양가죽을 쓴 이리의 모습이기에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특별히 최근 뉴스앤조이 홈페이지를 눈여겨보면 화면상단에 ‘가짜뉴스 팩트체크’ 코너가 크게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곳에 마우스를 가져가면 동성애, 이슬람·난민, 기타로 구분돼 있는데, 클릭하면 64건의 기사 최상단에 종교자유정책연구원(종자연) 활동을 하다 바울처럼 회심한 이정훈 교수를 비판하는 기사가 네 꼭지 연속 올려져 있다. 이어서 에이즈환자 치료전문가 염안섭 수동연세요양병원 원장 비판기사가 두 꼭지, 한국가족보건협회(한가협)의 ‘디셈버퍼스트’ 행사를 폄하하는 기사, 한겨레의 조작된 ‘가짜뉴스 공작기사’를 그대로 인용해 한겨레신문가짜뉴스피해자모임(한가모)을 비판하는 기사들, 반동성애기독시민연대(반동연)와 동성애동성혼반대국민연합(동반연)과 에스더기도운동본부(에스더) 등을 비판하는 기사들, 차별금지법 제정으로 피해를 입고 있는 외국사례를 왜곡·비판하며, 가짜난민신청자를 가짜뉴스라고 비판하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왜곡·거짓기사를 버젓이 올려놓고 있다. 이는 친동성애적이며 친이슬람적이고 극좌 편향적인 뉴스앤조이의 색깔을 그대로 보여주는 실례라 할 것이다.

지금껏 뉴스앤조이는 왜 그토록 성경이 금하고 있는 동성애와 한국교회를 심각히 파괴할 수 있는 차별금지법, 학생인권조례, 지방인권조례에 대해 맹목적 지지입장을 견지해온 것일까. 미국질병관리본부(CDC) 홈페이지에 분명히 적시돼 있는 MSM, 즉 남성동성애자 간 성교와 에이즈의 상관성과 위험성에 대해 왜 철저히 외면하는 것일까. 도대체 어떤 커넥션이 있기에, 동성애와 이슬람을 미화하며 독재자 김정은에게 짓밟히고 있는 북한주민의 인권과 강제 납치된 수많은 대한민국국민의 인권유린은 철저히 외면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면서 어떻게 동성애자들과 가짜난민들의 인권엔 혈안이 돼 광적으로 비호한단 말인가. 이것이 정녕 정상언론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일반언론도 아닌 기독교언론이라 자처하는 뉴조가 천부인권을 부여받은 우리 동포와 납치된 대한민국 국민들이 인권유린당하고 있는 끔찍한 현실엔 눈감은 채 오직 동성애와 가짜난민들 입장만을 대변하고 있다니 통탄스럽다. 이는 하나님 앞에 가증한 위선이며, 거짓되고 사악한 반기독교적 행태인 것이다.

크리스천투데이 보도를 통해서 볼 때, 뉴스앤조이는 김일성 수령교를 신봉하는 자들이 한국교회 파괴를 목적으로 설립한 교회 농단 세력으로 보인다. 기독교 언론인 것처럼 위장한 뉴조는 유물론과 반기독교 사상을 신봉하면서도 기독교 언론으로 위장하고 한국교회의 지원을 받으며 성장해 왔다. 이제는 뉴조가 유물론과 반기독교 사상을 신봉한다는 것을 자신들의 지면을 통해 스스로 인정하기에까지 이르렀다. 한국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인사들을 근거 없는 모략과 모함으로 공격하고 오히려 한국교회를 위험에 빠트리고자 활동한 종교자유정책연구원과 유착한 사실도 드러났다.

이로 미루어 뉴스앤조이는 교회에 잠입한 교회파괴 세력임이 입증되었고, 정의와 교회개혁을 외치면서도 정작 스스로는 한빛누리재단의 탈세 등 각종 어둠 속의 범죄와 연루된 혐의도 받고 있다. 한국교회가 이런 주사파, 친동성애, 친이슬람 악의 세력에 의해 그동안 농락당한 것을 생각하면 침통함을 금할 수 없다. 이제부터 한국교회는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 잠입해 활동하는 교회농단 세력, 교회 해체세력을 용인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모든 교회와 성도가 합심하여 교회를 농락한 주사파, 친동성애, 친이슬람 집단을 더 이상 교회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한다.

거듭 밝히거니와, 동성애는 창조질서와 성경적 진리에 어긋난다. 만일 차별금지법과 혐오표현금지법이 제정될 경우 한국교회는 영국을 비롯한 서유럽에서처럼 끔찍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차별금지법과 패키지로 묶인 동성결혼이 합법화되면 건강한 남녀결합에 의한 결혼제도가 파괴되고, 윤리도덕이 무너지고 우리사회 전체가 심각한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고, 한국교회도 위험해지기에 절대 용인해선 안 된다. 한국교회를 극우 적폐 및 혐오집단으로 몰기 위해 한겨레와 ‘가짜뉴스 프레임’ 씌우기를 작당 모의했던 뉴스앤조이는 한국교회와 한국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돼야 하며, 더 이상 정상언론으로 인정해선 안 될 것이다.

우리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반기독교언론 뉴스앤조이의 정체를 깨닫고, 후원교회들이 재정후원 중단하길 재차 촉구하며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하나, 한국교회 향해 총질하고 부정적 비판 보도, 파괴공작 일삼아온 뉴스앤조이는 즉각 잘못을 사과하고 폐간하라!

하나, 건설적 비판을 넘어 한국교회 등에 비수 꽂아온 반기독교언론 뉴스앤조이, 유물론자 포이어바흐와 성혁명가 빌헬름 라이히를 지지하는 뉴스앤조이는 기독언론사 타이틀 삭제하라!

하나, 김일성 수령교 신봉, 맹목적 동성애 옹호, 차별금지법 옹호, 가짜난민과 이슬람 옹호, 학생인권조례와 지방인권조례 조장은 물론, 북한주민의 인권과 강제 납치된 대한민국 국민의 인권유린 무시해온 뉴스앤조이는 즉각 폐간하라!

하나, 뉴스앤조이는 지금껏 교회재정문제를 비판해온 엄격한 잣대 그대로 불투명한 재정 즉시 공개하라!

하나, 검찰은 영리회사이면서 비영리 NGO로 가장해 후원금 모집하고, 한빛누리재단 통해 탈세 자행해온 뉴스앤조이에 대해 즉각 수사하라!

하나, 한국교회 파괴 주범 뉴스앤조이 살찌워온 후원교회들에게 재차 경고하며 더 이상 좌시치 않을 것을 천명한다. 재정후원 즉시 중단하라!

하나, 한국교회와 성도는 한국교회 파괴하려는 음모와 공작 꾀하고 있는 반기독교언론 뉴스앤조이를 차단하고 멀리하라!

2018년 12월 18일

한국교회수호결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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