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RzH6ZzeE2ws


매주 토요일 이른 아침, ‘거리의 사람들’을 만나러 간다. 새벽부터 준비한 불고기와 바나나, 오렌지 초코파이 레모네이드 커피 등을 차량에 싣고 “주님 오늘도 낯선 땅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들을 만나러 갑니다.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그들의 마음속에 복음이 심어질 수 있도록 은혜 내려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하다 보면 어느새 미국 애틀랜타 도라빌 거리에 도착한다.


인력시장에서 일거리를 얻지 못한 일용직 근로자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거리에 모여 있다. 오전 8시 이후 거리에 남아있는 사람은 대부분 일을 구하지 못한 이들이다. 비교적 일거리가 많은 여름에는 110∼120명, 일거리가 줄어드는 겨울에는 150∼200명 정도가 남아있다. 이들은 미국이란 낯선 땅에서 불법체류자로 살아가는 라티노(미국에 거주하는 라틴아메리카계 사람)이다. 일당을 벌지 못해 하루를 굶게 될 그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대접하자는 생각에 시작한 일이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마 25:35)
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 2007년부터 남편과 함께 시작한 일이었다. 8년 전부터는 크리스탈 교회 성도 20여명이 함께하면서 라티노 사역은 자리를 잡았다. 나는 2014년 블루스카이미션이란 국악선교단을 만들어 외로운 노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


사람들은 우리를 성공한 유학생 부부라고 했다. 그러나 그 성공의 이면에는 편애라고 할 만큼 크나큰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다. 또 무릎이 닳도록 기도하신 부모님의 다함없는 사랑도 있었다. 그 큰 사랑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남편 최우백 박사는 에이즈치료제 ‘트루바다’ 개발과 슈퍼박테리아 치료제 개발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과학자다. 그가 연구한 약들을 통해 고통당하는 많은 생명이 치료받을 것으로 믿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심고 뿌린 것보다 더 크게 넓게 가꾸어 주시고 열매를 맺게 해주셨다. 그동안 기도로 그려온 은혜의 시간을 지면을 통해 나누고 싶다.


한 해가 저물어가던 1984년 12월 28일, 9개월 된 아들 정환이를 업고 남편을 따라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남편은 이미 1년 전에 앨라배마 주립대학교 유기화학 박사과정을 전액 장학금을 받고 공부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또 강의조교나 연구조교로 일하면서 매월 800달러 정도를 따로 받기로 돼 있어 생활비 걱정은 없었다. 당시 한국에서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돈을 내고 다녀야 했다. 하지만 미국에선 전액 장학금으로 박사과정을 공부할 수 있었고 생활비도 보장된 조건이었기에 우리는 유학을 결행했다.
1주일 동안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작은 시누이집에 머물렀고, 다시 애틀랜타 공항을 거쳐 투스칼루사행 비행기를 탔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사건이 벌어졌다. 좌석번호를 받고 기내에 들어갔는데 남편과 내 자리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스튜어디스에게 같이 앉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사이 우리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고 말았다. 실랑이 끝에 영문도 모른 채 우린 좌석을 잃고 비행기에서 내려야 했다. 이민가방 6개는 주인도 없이 비행기와 함께 떠나버렸다. 화가 치밀었으나 영어가 서툰 우린 한숨만 쉬었다.
결국 애틀랜타 공항으로 남편의 누님이 황급히 연락을 받고 달려오셨다. 누님은 책임자에게 조목조목 따졌다.


“학생이 수업에 차질 없도록 배려해야 할 항공사가 어떻게 탑승한 사람을 비행기에서 내리게 했나요. 이것은 신문에 낼 큰 기삿거리 아닌가요?”


처음엔 우리를 내심 깔보며 다음에 출발하는 비행기 표로 줄지, 아니면 현금으로 돌려줄지를 묻던 이들이 쩔쩔매며 실수를 인정했다. 그들은 비행기 표를 다시 끊어주며 사과의 표시로 800달러를 주었다. 800달러. 그 돈은 남편이 앞으로 학교에서 조교로 일하면서 받을 월급과 신기하게도 일치하는 금액이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은 가난한 유학생인 우리를 위해 한 달간의 월급을 그런 식으로 당겨주셨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확신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학을 구체적으로 주관하시고 간섭하신다는 사실과 앞으로 미국생활을 축복하실 것을 말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우리의 전 재산은 1만1000달러였다. 남편이 대전 국방과학연구소에서 5년간 근무해 받은 퇴직금과 내가 적금 넣은 것, 그리고 전세보증금을 합친 금액이다. 열심히 공부해 성공하지 않으면 돌아갈 비행기 표조차 살 돈이 없었다.

미국 남부 앨라배마주 터스컬루사에 도착한 다음 날은 1985년 1월 첫째 주 주일이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하나님께 단을 쌓았던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땅 미국에 와 먼저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렸다.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창 8:20) 아직 영어가 서투른 우린 한인교회에서 한국말로 마음껏 예배를 드릴 수 있어 기뻤다.

남편은 학교 아파트 로즈타워 712호에 이민가방 6개를 올려주고 시험을 치르러 학교로 갔다. 짐을 풀면서 부모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런저런 생필품들을 가방에 손톱도 넣을 수 없을 정도로 꽉 눌러 넣어주셨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부모님이 그리워지면서 한국에서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5) 말했던 것처럼 나도 3대째 모태신앙이다. 외할머니는 부산 수정교회 권사님이셨다. 외할머니는 평생 하나님과 교우를 섬겼다. 오래도록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던 외할머니의 모습이 어린 나에게 기도가 어떤 것인가를 무언중에 가르쳐주었다.

외할머니의 신앙을 이어받은 어머니 유선희 권사 역시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셨다. 여학교 때부터 시작한 주일학교 교사를 돌아가실 때까지 쉬지 않으셨다. 아버지 박경수 장로는 군복무 중 세례를 받고 열심히 주를 섬겼다. 평생 교회와 5분 거리에서 사셨다. 선교하고 구제하는 것을 ‘하늘나라 저축’이라고 말씀하셨다. 은행 지점장이신 아버지가 은행에 저축하지 않고 당장 찾아 쓰지도 못하는 하늘나라에 왜 저축을 하시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제 와 생각하면 아버지 말씀이 옳았다. 아버지는 확실한 곳 가장 높은 이자를 주는 곳에 저축하신 것이다. 그 덕분에 나와 우리 형제들은 지금 마음껏 찾아 쓰고 있다. 나와 여동생은 신실한 신앙의 가정을 이뤘고 남동생 박제복 목사는 외할머니 때부터 섬겨온 부산 수정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다.


신애. 바로 내 이름이다. 아버지 어머니가 서로 믿고 사랑해서 얻은 딸이라고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했다. 난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 이름이 참 좋다. 이름처럼 하나님과 사람들을 믿고 사랑하며 살고 싶다. 부모님은 새벽마다 두 딸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다고 한다.

“하나님, 우리 딸들이 교회 반주자가 돼 평생을 하나님 일꾼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반주자가 귀한 시절이라 아버지는 딸들이 반주자가 되길 바라셨다. 우리는 그 소원대로 반주자가 됐다. 중학교 때부터 피아노를 배운 난 부산 동아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했고, 미국에서 오르간을 전공한 뒤 지금까지 교회에서 반주자로 봉사하고 있다. 아버지는 이렇게 당부하셨다. “반주하는 것도 설교하는 것 못잖게 중요한 거야. 반주자는 30분 전에 미리 가서 예배를 준비해야 한다.”

대학에 들어가 대학생선교회(CCC) 활동을 했다. CCC는 젊은 날의 신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부모님의 신앙이 원줄기라면 CCC는 가지가 돼 신앙을 뻗어 나가게 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난 영혼은 여호와의 성전이다. 여호와의 성전들이 세계 곳곳에 세워지기 위해 선교사를 파송해야 한다는 비전을 갖게 됐다. 선교사를 돕는 자로, 또 섬기는 자로 평생을 살 것을 하나님께 약속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지금도 주위에 계신 선교사님들에게 미흡하나마 반주자로 받는 사례비를 보내고 있다.

대학졸업 후 결혼을 위해 기도했다. 내가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는 사람을 달라고 기도했다. 나를 가장 잘 아시는 주님께서 내가 바라고 원하는 상대보다 더 좋은 상대를 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1982년 2월 큰이모의 소개로 남편을 만났다. 그는 서울공대 공업화학과를 졸업하고 대전에 있는 국방과학연구소에서 근무했다. 첫인상만으로도 진실하고 성실한 청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천주교 신자였고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저 사람이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 짝이라면 그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갖게 해주시고 본인 스스로 세례를 받겠다는 말을 하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저 사람을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짝으로 확신하고 결혼하겠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창 24:10∼27), 나도 그가 나의 남편이 될 사람인지 알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는 나를 만난 이후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대전에 있는 대흥침례교회에서 안종만 목사님께 성경을 배우면서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으로 변화했다. 1982년 6월 6일. 그는 대흥침례교회에서 안 목사님을 통해 침례를 받았다. 이후 남편은 주일예배는 물론 수요예배와 성경공부에도 빠짐없이 참석했고 성가대원으로 봉사했다. 진실하고 충성스러운 성품이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성실하고 정직했다. 십일조도 기쁨으로 드렸다. 이런 모습을 보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서 나의 남편으로 예비하신 사람이란 확신이 들었다.


82년 10월 16일 부산 수정교회에서 구영기 목사님의 주례와 안 목사님의 축복기도 속에 가정을 이루었다. 그는 국방과학연구소에서 5년의 방위산업체 임기가 끝나면 유학을 가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나 역시 대학졸업 후 외국에 나가 오르간 공부를 할 수 있기를 기도했는데 그가 유학을 가고 싶다고 하니까 그 기도가 이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부모님은 사위를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다고 했다. “하나님 우리 사위가 훌륭한 과학자가 되어 인류를 위해 공헌하게 해주시고 또 노벨상을 받아 나라와 민족을 빛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주십시오.”


남편이 간염과 에이즈를 치료하는 신약을 발명해 세계적인 과학자로 인정받게 된 것은 바로 새벽마다 눈물로 기도하신 부모님의 기도 덕분이었다. 이민 가방 가득한 짐을 풀면서 지난 시간을 반추하다 ‘더 이상 지나간 날들의 추억 속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은 새로운 것들에 부딪히며 많은 어려움을 견뎌야 하는 미국 땅이었다.


이민 가방 6개를 아파트에 올려놓고 시험을 치러 간 남편을 위해 기도했다. 유학 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시험이었다. 4과목을 다 통과해야 6과목(18학점)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그만큼의 과목을 면제받으면 1년에서 1년 반 정도 더 빨리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까지 신입생 중 4과목을 모두 통과한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2과목 정도 통과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시험을 치른 결과 남편은 그 어려운 시험을 모두 다 통과했다. 남편이 시험을 쉽게 통과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였다. 한국에서 GRE(대학원 입학자격시험)를 준비하면서 풀었던 문제 중에서 비슷한 문제들이 나왔기 때문에 완벽하게 다 풀 수 있었다고 했다. 교수마다 서로 자기 밑에서 박사과정을 할 것을 권했지만 남편은 매켄지 교수 밑에서 박사과정을 밟기로 했다.


남편은 매일 새벽 2, 3시까지 도서관에서 죽기 살기로 공부했다. 공부하는 데는 타고난 사람 같았다. 남편은 분명하게 알지 않고서는 대충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다. 확실한 대답을 찾아내고 거기다가 응용까지 해가며 공부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남편은 모든 힘든 과정을 완벽하게 소화했고 졸업 프로젝트 실험도 성실하게 했다. 3년 반 만에 박사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졸업이 눈앞에 오는 것 같았다. 매켄지 교수도 졸업을 준비하라고 했다. 그러나 학과장은 3년 반 만에 졸업을 시켜줄 수 없다며 조교로 일하며 남은 시간을 채울 것을 요구했다. 지금껏 앨라배마 주립대에서 3년 반 만에 화학 박사학위를 준 적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남편은 박사 자격시험도 다 통과한 후였고 전공과목도 모두 이수했으며 졸업논문 실험도 착실히 완수해 왔기에 졸업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 믿었다. 그래서 일자리를 찾을 꿈에 부풀어 있었는데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심한 분노와 좌절감을 견딜 수 없어 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보 우리 LA에 가서 장사나 합시다. 이제 영어도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됐고 미국 돌아가는 사정도 파악했으니 이곳을 떠나 LA에 가서 살길을 찾아봅시다.”


그런 남편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나는 매일 새벽마다 교회에 가서 엎드려 기도했다.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으로 믿고 남편이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도록 기도했다. 그땐 기도 말고는 내가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미국에선 울타리가 되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한국에는 부모님 선후배 믿음의 동역자 등 수많은 사람이 나의 울타리가 돼 많은 기도와 사랑을 베풀어 주었다. 이곳 미국에는 하나님밖에 없었기에 더욱더 하나님께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말씀을 꼭 붙잡고 눈물로 드린 기도가 응답됐다. 남편은 1988년 에머리대학 화학과 포스트 닥터로 일하게 됐고 박사학위는 89년에 받았다. 남편의 박사학위 논문은 항생제에 관한 것이다. 에머리대에서는 에이즈에 관한 연구를 담당했다. 이 시대 가장 힘든 난치병에 대한 연구를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과제로 주신 것이다.


에이즈 때문에 자포자기한 상태로 죽을 날만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 면역항체가 만들어지지 않아서 속수무책으로 죽어갈 수밖에 없는 수많은 사람,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을까 싶어 자신의 병명을 숨기며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 죗값으로 당연히 받는 형벌이라고 여기며 돌을 던지는 세상 사람들에게 묵묵히 돌을 맞아야 하는 불쌍한 영혼들…. 그들을 살리게 해달라고 눈물로 기도했다. 기도하는 가운데 예수님이 결코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의 죄를 지신 예수님이 그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사랑하고 계심을 믿게 되었다. 그들이 예수님의 생명을 접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그들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이 개발돼야 하는데 이 약을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을 남편에게 달라고 새벽마다 눈물로 매달렸다.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이셨다. 그런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기에 남편은 그 힘든 연구를 기도와 믿음으로 완수할 수 있었다. 그 연구 결과로 지금 신약이 개발됐고 에이즈로 죽어가는 사람들, 절망 중에 있는 난치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다. 남편은 에이즈 치료제 ‘트루바다’를 탄생시킨 주역이 됐고 2000년 슈퍼박테리아 치료제 개발을 목표로 미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폽신더시스(FOB Synthesis, inc.)를 설립했다. 남편은 트루바다를 개발해 받은 로열티를 슈퍼박테리아 치료제 개발에 쏟아부으며 이렇게 말했다. “신약 개발은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돈을 벌 목적보다는 질병을 퇴치하겠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해요.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하나님께 의지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면 분명히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는 갈라디아서 6장 9절의 말씀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현재 개발 중인 슈퍼박테리아 치료제는 기존 항생제로 치료할 수 없는 그램음성 세균(gram-negative)에 탁월한 효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남편이 운영하는 제약회사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것으로 믿는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은 심히 창대하게 하실 하나님께서 남편의 회사를 세계 속으로 뻗어 나가게 하셔서 지사가 들어서는 곳마다 선교의 장이 열리게 해주실 것도 믿고 있다.


이렇게 남편의 앞길을 열어주신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남편이 앨라배마대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을 때, 오르간 레슨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남편이 논문을 발표하러 학회에 가고 없는 중에 갑자기 10년 전에 했던 기도가 생각났다. 유학을 가서 오르간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한국에서 후진을 키우며 순모임을 통해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겠다고 했던 기도가 생각났다.


“그러기 위해선 공부를 해야 해.”


어두운 방에 전구가 켜지듯 불현듯 마음에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이 불일 듯 일었다. 앨라배마대 음대 이상희 교수를 찾아갔다. 이전에 그분을 만난 적은 없었다. 다만 다른 유학생들로부터 한국 교수가 음대에서 피아노와 이론을 강의한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앨라배마대학 이상희 교수에게 오르간을 레슨해 줄 좋은 교수님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미국 동남부 지역에서 제일 유명하고 실력 있는 오르간 교수가 우리 대학 학과장으로 계시는데 그분이 과연 레슨을 해 줄지는 알 수 없다”면서 학과장인 워런 허튼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나를 소개해 주었다.
 음대 연습실에서 오디션을 준비했다. 연습실엔 전자오르간은 한 대도 없고 모두 파이프오른간만 있었다. 파이프오르간 연주자를 훌륭하게 키워내기 위한 허튼 교수의 고집을 엿볼 수 있었다. 며칠 동안 최선을 다해 연습하는데 누군가 연습실 문을 노크했다. 인자한 모습의 할아버지였다.

“학생은 누구의 제자요?”


“저는 지도교수가 없어요. 그러나 오르간 공부를 하고 싶어 이상희 교수님을 통해 허튼 교수님을 소개받기로 했습니다.”


어설픈 영어로 대답하자 그는 자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며 지금 치고 있는 곡을 다시 연주해 보라고 했다. 가슴을 졸이며 바흐의 곡을 연주했다. 연주가 끝나자 교수님은 흡족해하며 당장 레슨을 해주겠다고 했다. 레슨비는 20달러라고 했다. 꿈인지 생시인지 도저히 분간되지 않았다. 미국 동남부 지역에서 그토록 유명한 오르간 선생님이신 허튼 교수의 제자가 되다니. 그것은 ‘여호와 이레’였다.

 주님은 간절한 마음으로 구하고 두드릴 때마다 그렇게 문을 열어주셨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당시 출석하던 투스칼루사 한인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했다. 물론 우리가 빌려 쓰고 있는 미국교회에는 파이프오르간이 있었지만 한인교회 예배에는 사용하지 못했다. 내가 교회에서 오르간 연습을 못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교수님은 미국교회에 전화해 한인교회 예배시간에 오르간을 사용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셨다. 교회 열쇠와 오르간 열쇠를 건네받은 난 언제나 연습할 수 있게 됐다. ‘내가 무엇이관데 이렇게 귀하게 대우해 주시는가.’ 말할 수 없이 감사했다.



오르간 공부에 푹 빠진 난 새벽 3시에 일어나 교회로 갔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교회에서 열심히 연습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청중이셨다. 새벽 3시부터 연습하다 6시 새벽기도에 참석한 후 집에 와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아들 정환이를 조기교육원에 보낸 후 다시 교회에 가서 연습했다. 그렇게 1년 반 정도 좋은 교수님을 통해 기초부터 정확하게 배웠다.


그 무렵 남편은 박사 학위를 마친 후 애틀랜타에 있는 에머리대학으로 가게 됐다. 남편이 에머리대학으로 옮기게 된 것은 분명 축하할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제껏 준비해오던 공부가 허사로 돌아가는 거처럼 보였다. 앨라배마 음악대학원 석사과정에 들어가기 위해 토플 준비와 오디션 곡을 연습하고 있었다. 이젠 더 이상 레슨을 받을 수도 없고 석사과정 공부도 할 수 없다는 실망감에 교수님 앞에서 엉엉 울고 말았다.


그러나 신실하신 하나님께선 이미 새로운 길을 준비해 놓고 계셨다. 교수님은 우는 나를 위로하시면서 애틀랜타에 있는 머서대학 음대 학과장이신 위즐러 교수를 소개해 주셨다. 애틀랜타로 이사 온 후, 교회 반주자에게 주는 장학금을 받으며 머서대학원 종교음악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결코 내가 실력이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투스칼루사 한인교회에서 기쁨으로 반주한 결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었다.

1990년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머서대학에서 종교음악(오르간) 석사학위를 받았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기쁨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누렸는데 그중 하나가 ‘조지아주 오르간 경연대회’(석사과정 이상 부문)에서 1등을 했던 일이다. 상금 500달러와 파이프로 만든 멋진 트로피를 받으며 남편에게 “이 모든 것은 하나님과 함께 연습했던 저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격려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계속 공부하고 싶었지만 둘째 인경이를 낳고 키우며 학교에 다닐 여건이 되지 않았다. 웨스트민스터 콰이어대학원 린핀코트 교수님에게 레슨만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 중에 ‘예배하는 오르간 연주자’가 되고 싶은 열정이 다시 일어났다. 웨스트민스터 콰이어대학원 오르간 연주 석사과정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이 장학금에 얽힌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어 이야기하고 싶다.
이상하게도 입학한 이듬해에는 장학금이 나오지 않았다. 행정처에 알아보니 지난해 학교의 행정 실수로 내가 장학금을 받았다는 거였다. 대학원생 중 성이 Choi(남편의 성이 최씨였기에 난 미국에서 최신애란 이름을 사용한다)란 사람의 장학금을 실수로 내게 줬다고 했다. 학교에선 자신들의 실수이므로 나에게도 주고 그분에게도 줬다고 설명했다.

실망한 표정으로 행정실을 나와 서 있는데 지나가던 학과장이 무슨 근심이 있냐고 물었다. 전후 사정을 들은 학과장은 놀랍게도 “신애 걱정하지 말아요. 어떤 분이 돌아가시면서 오르간 학과에 기부한 장학기금이 있습니다. 당신을 올해 첫 장학생으로 선정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은혜였다.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기면 주님은 사랑으로 응답하셨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더욱 열심히 오르간 반주로 교회를 섬겼다.


대학원 공부는 쉽지 않았다. 매일 5시간 이상 오르간 연습을 했다. 저녁식사 후 인경이를 포대기로 업고 브리스톨 채플에 가서 밤 12시까지 졸업 연주회를 준비했다. 오르간 곡은 성가곡이 많아 연주하는 동안 예배하는 마음이 된다. 그래서 연습을 아무리 많이 해도 힘든 줄 몰랐다. 오르간 연주를 하는 동안 새근새근 평화롭게 자던 인경이 모습이 눈에 선하다.

미국 학교는 학년이 끝날 무렵 Honor’s Day Ceremony가 있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데 나는 매년 이것을 놓치지 않았다. 남편은 물론 아들과 딸이 엄마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나이도 많고 영어도 유창하지 않은 데다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던 엄마가 머서대학에서 종교음악 석사학위를 받고, 웨스트민스터 콰이어대학원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전 과목 A학점으로 석사학위를 마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1999년 5월 8일 웨스트민스터 콰이어대학원에서 우등상을 받으며 졸업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고 말없이 외조하며 리포트를 낼 때마다 가장 좋은 보고서가 되도록 지도해주던 남편에게 감사했다.
  졸업과 동시에 남편이 1년 먼저 내려가 있는 애틀랜타 바이닝즈로 이사했다. 매일 새벽예배에서 오르간 연주를 하며 ‘예수님 사랑해요. 내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불로 먼저 뜨거워지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주일 아침에는 그날 연주할 곡들을 미리 연습하며 예배에 참석할 성도들을 위해 기도했다.

봄철의 햇살과 여름·가을의 바람 그리고 겨울의 해와 달…. 이 모든 것을 운행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 부부는 감사로 하루를 열었다. 그러던 2007년 교회 성도들과 홈리스 쉼터에서 식당봉사를 할 때, 불법체류자로 낙인찍힌 채 일용직 근로자로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는 이민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낯선 땅에서 나그네로 살며 먹고살 것을 걱정하는 이들을 돕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의 대도시엔 일명 ‘인력시장’으로 불리는 일용직 근로자들이 모이는 거리가 있다. 건축업자나 식당업자들이 그날 필요한 인력을 구하러 이곳에 온다. 오전 8시 이후에도 거리에 남는 사람은 그날 일을 구하지 못한 사람이다. 부양가족이 20명인데 일거리가 없어 걱정이라고 말하는 사람, 일하지 않으면 당장 먹을 것을 살 수 없는 사람 등 대부분 라티노들이었다. 당시 노숙인을 지원하는 단체는 많았지만 불법체류 일용직 근로자를 돕는 손길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또 제 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마 20:3) 그들에게 일거리를 줄 수는 없지만 그날 일당을 벌지 못해 밥을 굶게 될 그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라도 대접하고 싶었다. 봉사에 동참할 20여명의 성도와 함께 2007년 5월 26일 사역을 시작했다. 새벽에 교회에서 닭간장조림, 만두, 볶음밥을 넣은 도시락을 만들었다. 커피와 레모네이드, 사과 한 박스를 후식으로 준비했다.


애틀랜타 뷰포드거리와 샬로포드거리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처음엔 한 달에 한 번 정도 하려 했다. 그런데 막상 거리에 나가 보니 생각보다 많은 라티노가 모였다. 120여명의 라티노 형제들이 준비해 간 음식을 너무나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남편은 이 사역을 매주 하자고 제안했다.


매주 100∼150명분의 식사를 준비하려면 주중에 시장을 보고 토요일 새벽부터 음식을 만들어 배식하는 것이 너무 힘들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염려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이런 마음을 주셨다.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14:29) 내 주위에 있는 나그네들을 먹이며 배부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축복의 통로가 됨을 깨닫게 하셨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사역은 2010년 5월 29일까지 158주를 섬기다 크리스탈교회를 개척하는 동안 잠시 쉬었다가 2011년 4월 2일 다시 시작해 370여회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돼지불고기 야채덮밥을 주메뉴로 하고 겨울엔 따뜻한 수프를 곁들이고 있다. 매년 크리스마스에는 겨울용 패딩 재킷, 장갑, 털모자, 양말 등을 전했다.

 봉사 초기에는 주위의 음식점에서 “왜 가난한 가게 돈을 못 벌게 하느냐”며 경찰에 신고해 이리저리 쫓겨 다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이 이해해 주었다. 사역이 발전해 지금은 단기선교 훈련을 위해 한국에서 와 있는 한국대학생선교회 학생들이 스패니시 찬양으로 함께해 더욱 은혜로운 시간이 됐다. 이 사역을 돕기 위해 20여명의 헌신된 성도들이 섬기고 있다. 지금까지 사람이 없어 어려운 적이 없을 만큼 모두 헌신적으로 섬기고 있다. 또 물질과 기도로 후원하는 분들을 보내주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이 일을 맡겨주신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 받은 은혜와 기쁨이 크다


“말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슥 6:12) 대학교 1학년 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비전의 말씀이다. 이 말씀이 내 삶을 이끌었다. 그래서 생명의 싹이 돋아나는 일에, 영혼을 살리는 일에, 하나님을 알아가고 섬기는 일에 초점을 맞춰 살았다.


‘주님 한 영혼을 전도해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지는 일에, 눈에 보이는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 저를 사용해 주소서’라는 마음으로 중·고등부 교사로 봉사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고 형편이 주어지는 대로 한인교회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했다.


그러던 중 남편이 목장 모임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했다. 남편은 주석을 읽고 관련 문헌을 찾으며 성경공부를 이끌었다. 이 시기 말씀을 사모하며 삶을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가 어떤 것인지를 배울 수 있었다. 라티노 무료급식 사역도 그 과정 중 하나였다. 더 나아가 성경공부 모임에 참여한 분들의 뜻을 모아 2010년 6월 6일, 우리 집 지하실에서 첫 예배를 드리고 크리스탈교회를 개척했다.
사람들은 교회 이름의 의미를 “깨끗하고 투명하자는 의미인가요”라고 종종 묻는다. 물론 그런 의미도 있지만 본 의미는 좀 더 깊다. 크리스탈은 자체 발광하지 않고 바깥에서 비치는 빛을 반사해 빛난다. 많이 깎이고 깨끗해야 영롱한 빛을 반사할 수 있다.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어둠 속에 빛을 밝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되기를, 교회 재정과 행정이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운영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담임목사님을 청빙하지 못한 상태에서 개척교회를 이끌어가는 것은 성경공부나 목장 모임에서 성도들을 섬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사역이었다. 교회의 주인이 되신 주님만 바라보며 새벽마다 하나님 사역에 귀하게 쓰이는 믿음의 일꾼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개척 멤버들도 한마음으로 교회를 위해 희생과 헌신으로 함께했다. 2011년 1월, 담임목사님이 부임하기 전까지 우리 부부는 필요할 때마다 새벽기도와 수요예배를 인도하며 섬겼다. 갓 태어난 크리스탈교회에 필요한 말씀 ‘동냥’을 다니던 어려움은 있었지만 기회가 되는 대로 많은 목사님과 선교사님이 주일예배를 인도해 주셨다.
집에서 개척예배를 드린 지 두 달 후 미국 교회를 빌려 주일예배를 드렸다. 이후 오피스 빌딩에 있는 사무실을 빌려 사용하다 2016년 서머나 지역에 있는 교회를 사서 이전해 지금에 이른다. 1대 류성진 목사님에 이어 이경훈 목사님이 부임해 새로운 부흥의 불길을 타오르게 하고 있다.


라티노 무료급식 사역이 자리 잡아갈 무렵 또 다른 사역으로 복음을 전하고 싶었다. 국악선교단인 ‘블루스카이미션’을 창단했다. 10여명으로 구성된 선교단은 2014년 8월부터 외로운 독거노인들을 찾아가 복음국악찬양에 맞춘 부채춤, 아리랑춤, 난타, 수화찬양 등으로 예수님의 위로와 사랑을 나누고 있다. 연습하느라 육체적으로 힘들지만 더할 수 없는 은혜와 기쁨을 누리고 있다. 이제는 선교단의 기량이 많이 향상돼 미국 조지아주 케네소주립대학 ‘한국문화의 밤’에서 전통무용과 난타로 복음을 전했다. 또 노인아파트와 노인병원은 물론 선교지 아이티에서도 몸과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친양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5) 대학 시절엔 선교사로 헌신하고 싶었다. 그러나 결혼 후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현장 선교사도 필요하지만 그를 돕는 일을 누군가는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님이 허락하신다면 앞으로 선교사들이 재충전할 수 있는 선교센터를 만들고 싶다. 말씀과 기도로 무장된 전문인 선교사를 훈련하고 파송할 수 있는 곳, 선교지의 필요에 따라 의사 교수 음악가 기술자 찬양사역자 등을 보낼 수 있는 곳이 만들어지길 꿈꾼다. 이런 마음으로 교회의 단기선교는 빠지지 않고 참여하고 있으며 기회가 닿는 대로 선교사와 이웃을 돕는 사역에 동참하고 있다.
2009년 팬아시안센터에서 애틀랜타에 있는 가난한 이민자들을 위해 무료 또는 최저 의료비만 받고 치료해 주는 ‘도와클리닉’을 개원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유학생들이 가입한 의료보험으로는 병원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몸이 아파도 제대로 병원 치료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 부부는 알고 있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집사님이 팬아시안센터 총무로 일하셨는데 마침 도움을 요청해 오셨다. 우리가 겪었던 어려움을 생각하며 흔쾌히 도왔다. 의료혜택을 받기 어려운 이들을 돌보는 클리닉을 돕는 것은 강도 만나 쓰러진 자를 돕는 사마리아인 같은 이웃으로 사는 것이다.
또 집사님의 제안으로 애틀랜타에 사는 한인 노인들을 위한 노인아파트 건립과 ‘매 맞는 아내를 위한 쉼터’ 건립을 후원하면서 한인사회 곳곳에 도움이 필요한 곳이 많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알게 됐다. 그래서 애틀랜타에 있는 장애어린이를 위한 사랑방 건립과 화재로 전소된 애틀랜타 한인회관 건립을 후원할 수 있었다.


할머니로부터 이어온 신앙이 이제 내 자식들에게 4대째 이어지고 있다. 우리 집안의 신앙은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미국에까지 건너와 뿌리를 깊이 내렸고 가지를 널리 뻗어가고 있다. 9개월 때 엄마 등에 업혀 미국으로 온 아들 정환이는 하나님 은혜 가운데 아름답게 성장해 코넬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의사가 돼 보스턴 칠드런즈 호스피털 펠로로 일하고 있다. 첼로를 전공한 김연경 자매와 결혼해 믿음의 가정을 이뤘다. 딸 인경은 2014년 웨일스여대를 졸업하고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FIDM(Fashion Institute of Design Marketing) 대학에서 무대의상 디자인을 전공했다. 현재 워너브라더스 영화사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


남편 최우백 장로도 신실한 믿음으로 교회를 섬기며 오늘도 하나님이 주신 과제를 열심히 연구하고 있다. 남편이 신약 개발을 많이 하는 것도 약이 없어 죽어가는 환자들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에서다. 그가 연구하는 약들이 고통당하는 많은 생명을 치료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또 그 약들이 가는 모든 곳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전해지고 복음이 뿌리내릴 것을 확신한다. 그리고 모든 영광이 오직 주님께 올려지길 바란다.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기 위해 평생을 교회에서 가까운 곳에서만 사셨던 부모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나를 위한 부모님의 기도가 내 인생을 그려갔듯이, 자녀를 위한 우리 부부의 기도가 자녀들의 인생을 그려 가리라 믿는다. 우리 부부는 매일 새벽기도로 씨를 뿌리고 봉사하는 데도 앞장설 것이다. 주님의 이름을 높이며 선포하는 간증들이 내 자녀와 자손들을 통해 넘쳐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이 글을 맺는다.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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