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 6, 2025 Brad TV
카터와 김일성 대체 무슨 관계였을까?
2016.03.26 10:18 이주천 미래한국 편집위원
[이주천 교수의 심층추적] 親北 대통령 지미 카터 해부(中)
카터 대통령, 편향적 인권외교와 주한미군 철수 해프닝으로 한국 안보에 결정적 타격 가한 반면, 지구상 최악의 인권 유린 전범, 주한미군 도끼로 찍어 죽인 김일성은 감싸고 돌아
카터는 백악관에 취임하자마자 아시아의 혈맹(血盟) 한국에 대한 압박의 수위를 높여갔다. 관련 부서에 주한미군 철수 검토를 지시했고, 2월에는 주한 미국 대사와 주한미군 사령관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서신에서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거론하면서 인권 정책을 개선해 줄 것을 촉구했다.
미 의회도 행정부와 손발을 맞췄다. 미 의회는 인권 문제와 관련, 대한(對韓) 군사원조와 경제원조 및 미 잉여농산물 판매 등의 삭감과 원자력발전소 건설 등을 위한 미 수출입은행의 지불보증 중지, 세계은행과 아시아개발은행의 대한 융자 승인에 대한 미국 대표의 찬성 보류 등을 내세워 압력을 가해왔다.
카터 행정부의 인권외교는 과거 행정부의 외교 행태와는 전혀 다른 점이 있었다. 미국의 역대 행정부는 소련과 동구권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비난했으나 자유 우방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우방국의 체면을 존중하여 조심스럽게 조용히 비공개로 다뤄왔다.
그러나 카터 행정부는 동서진영을 막론하고 외교에서 인권 문제를 꼭 포함시킨다는 방침을 내걸었다. 공산진영에 대해서는 종전과 같은 수준으로 다루되, 자유 우방에 대해서는 목청을 높여서 공개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특히 북한의 공산체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도 없이 북의 남침 위협에 대비하는 한국에 대해서는 공공연하게 인권 문제를 시비 걸기 시작했다.
이란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공개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카터의 인권외교로 인한 결과물이 나오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3년만에 아시아에서는 박정희 유신체제가, 중동 이란에서는 팔레비 왕정 붕괴를 목격하게 된다.
3월 9일, 카터 대통령은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미국 전역에 생중계된 기자회견에서 주한미군의 공군을 제외한 지상군을 1978년부터 4~5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철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카터는 철군 문제를 한국과 일본과 사전 협의도 거치지 않았고, 합동참모본부의 견해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처리했다.
주한미군 철수, 미국 내부에서도 격렬한 반발 불러
당시 박동진 외무장관은 워싱턴에서 체류하면서 철군 문제를 놓고 카터 대통령을 면담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때였다. 충격을 받은 박동진 외무장관을 달래기는커녕 카터는 박정희 대통령의 인권 탄압은 즉각 중지되어야 한다고 몰아붙였다.
카터가 브레진스키와 밴스에게 쓴 메모에서 ①미 지상군 부대는 철수하지만 공군은 남을 것이며, ②미 의회와 미 국민에 의해 결정된 한미관계는 최저점을 기록하고 있고, ③박정희가 정치범에 대한 선처를 취하지 않는 한 현재의 군사원조 제공은 곤란하며, 인권 이슈에 대해 좌시하지 않을 것 등이 언급되어 있다.
카터의 성급한 철군 결정은 한반도 안보 상황과 주변국의 대응에 대한 치밀한 사전 검토 없이 서둘러 결정되었기에 행정부 내부의 안보·군사 관련 관료들의 집단적 반대에 봉착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장 큰 반발은 주한미군을 중심으로 한 군 수뇌부와 미 중앙정보국(CIA)으로부터 나왔다. 주한미군 사령부의 참모장 존 싱글러브 소장은 워싱턴포스터 지와의 기자회견에서 카터의 철군정책을 노골적으로 비판하여 항명파동의 주역이 되었다. 장차 육군참모총장 물망에 올랐던 싱글러브는 자신의 신념 때문에 1년 뒤 예편하게 된다. 베시 주한미군 사령관도 싱글러브의 견해에 동조했다.
‘싱글러브 항명파동’은 행정부 내부와 의회의 주한미군 철수 반대 여론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군 수뇌부와 미 의회의 보수세력 반발에 직면한 카터는 반대를 무마하기 위해 주한미군 철수와 병행하여 한국 정부에 19억 달러에 달하는 군사원조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해외에서는 동아시아의 우방들, 특히 일본의 반발이 심각했다. 일본 정부는 한반도가 동아시아 및 일본의 평화에 필수적이라고 판단했기에 우려를 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한미군도끼로 찍어 죽인 북한은 애오라지 감싸고 돌아
한국에 대한 압박의 수위를 높이는 와중에도 카터 행정부는 1977년 3월 18일, 북한을 비롯한 공산베트남(월맹), 쿠바, 캄보디아 등에 대한 여행제한 규제를 철폐했다. 여행제한조치가 해제된 지 4개월만인 1977년 7월, 북한은 비행 착오로 비무장지대에서 군사분계선을 넘은 미군 헬기를 공격하여 격추시켜 미군 3명이 사망했다.
카터는 그 비행이 실수였다고 언급하면서 충돌을 최소화했다. 생존자 1명은 송환되었다. 이 사건은 카터의 대북정책과 관련, 임기 내내 유화노선으로 일관했던 좋은 사례다. 이점에서 역사가들이 퇴임한 카터에게 ‘친북 대통령’이란 닉네임을 붙여도 카터는 억울하다고 부인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미국 사회는 북한의 호전성을 잊지 않았다. 1976년 판문점 근처에서 미루나무를 베는 미군 병사가 북한군 도끼에 맞아 살해된 사건이 있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 지는 북한이 과거 수년간 일본, 중동, 유럽 등지에서 활약하는 수천 명의 게릴라와 국제 테러리스트 해방주의자들의 훈련 장소가 되어왔다고 비난했다(동아일보, 1977년 3월 16일). 1979년 베트남 캄란만에 소련 해군기지가 들어서면서 미국 사회의 분위기는 점차 보수화되어갔다.
‘평화의 중재자’로 노벨평화상 수상
카터는 세계의 분쟁지역을 거중조정하는 평화의 중재자(peace-maker)가 될 야심을 키우고 있었다. 재임 시절 줄곧 중동과 한반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후일 그는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분쟁을 조정하여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된다. 카터는 한국에 대해 인권외교와 철군정책으로 쉴 새 없이 압박을 가한 반면, 한쪽에서는 대북 접촉을 기대했다.
카터는 1977년 9월 유고 대통령 티토의 친서를 받는 자리에서 북한과의 대화 내지 접촉을 희망한다고 밝혔다. 미국은 북한과 협상할 수 있다면서 한국이 참여하는 것이 전제조건이라고 밝혔다.
얼마 안 가 카터는 티토를 통해 미국과 남북한 간 3자회담을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남북한이 3자회담을 거부하면서 이 구상은 취소되었다. 카터 행정부는 3자회담이 취소되자 미국 탁구선수단의 평양 대회 참가를 허용했다.
이 기회를 놓칠 김일성이 아니었다. 1977년 여름과 다음 해 봄에 걸쳐 카터를 향한 김일성의 끈질긴 구애(求愛)작전이 이어졌다. 5월에는 가봉의 봉고 대통령을 통해, 10월에는 유고의 티토를 통해, 1978년 4월에는 루마니아 차우세스크 대통령을 통해 카터에게 친서를 보내 미북 간 직접 대화를 촉구하면서 카터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카터와 김일성, 무슨 관계이기에…
카터는 북한 군사력 증강에 대한 미국 내 보수 세력의 반발을 무시하면서 대북 유화책을 추진했다. 카터 행정부의 대북전략은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책략을 구사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닉슨의 중공 방문을 통해 중국을 미국 편으로 끌어들여 소련을 견제하려고 키신저가 썼던 카드다. 즉 스탈린에 저항하고 독자노선을 추구한 유고의 티토를 모델로 삼아 김일성을 ‘아시아의 티토’로 만들려고 시도한 것이다.
백악관 안전보장담당관 브레진스키도 이를 거들었다. 당시 미국의 소위 진보세력은 북한의 변화 가능성을 믿었고, 북한의 자주국방과 주체사상을 소련과 중국에 저항한 독자노선으로 이해한 듯하다.
그러나 카터가 주한미군 철수를 무기로 하여 박정희 정부에 대한 인권 개선을 촉구한 인권정책은 순탄하지 못했다. 비밀리에 핵과 미사일 개발을 서둘렀던 박정희 정부의 완강한 저항, 안보 불안감에 빠진 일본을 위시한 우방국들의 반발, 미국 내 군부와 CIA, 미 의회를 중심으로 한 집단적 반대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1978년 4월 21일, 사면초가에 빠진 카터는 주한미군 철수 일정 연기를 발표했다. 이로써 14개월간 한미 양국의 불안감을 고조시켰던 카터의 철군정책은 그 해 3000여 명의 육군 병력만 한국으로부터 철수하고 종료되었다. 그리고 그해 11월 미 지상군 철수의 전략 공백을 메우고 한미연합작전 능력을 키우기 위해, 한미연합군사령부를 창설했다.
1979년 카터의 방한 목적은 철군 중단을 약속한 대가로 박정희 정부로부터 정치범 석방, 언론과 집회의 자유 등 인권 신장을 약속받기 위한 것이었다. 방한 중에 보여준 카터의 오만무례함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지울 수 없는 자존심의 상처를 안겨주었다.
6월 29일 저녁, 김포공항에서 박 대통령은 한 시간 이상 카터 일행을 기다려야 했다. 미국이 카터의 신변 보호를 이유로 정확한 도착시간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의 나라를 한밤중에 방문하는 것은 외교 관례에 어긋나는 무례였다. 심지어 김포공항에 도착한 카터는 박 대통령과 간단한 인사만 나누고 헬기로 동두천에 있는 미 2사단으로 떠나버렸다. 독자들은 후일 카터가 퇴임 후 평양을 방문, 김일성과 면담했을 때 보여준 공손하고도 정중한 카터의 태도와 비교할 필요가 있다.
카터의 인권외교의 문제점은 공산권과 미국의 우방 및 제3세계에 보편적으로 적용된 것이 아니었다. 한국, 이란 등 안보 위협을 받거나 내정이 혼란하여 치안이 불안한 미국의 우방 국가에 유독 강하게 적용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것은 카터의 개인적 편견과 편의에 따라 편파적으로 적용되었다.
카터는 워싱턴에 오기 전에는 물론, 취임 이후에도 인권이 가장 열악한 북한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언급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카터와 김일성과의 관계에서 상당한 의혹이 제기되는 부분이다. 과연 카터와 북한 김일성과의 관계는 언제부터인가 말 못할 끈끈하고도 친밀한 거래 내지 유착관계가 형성된 것인가?
카터의 인권외교는 한국, 이란만 겨냥
카터가 북한 체제가 독재세습정권이요 세계 최악의 인권유린국가라는 점을 모르는 촌뜨기 정치인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인권외교의 아름다운 수식어로 마취된 순진한 판단이다. 그렇다면 그토록 인권외교를 외치는 카터가 북한과 김일성의 인권 유린과 독재 세습에는 침묵으로 일관했을까?
결국 카터의 인권외교는 미국의 외교정책으로는 한계를 노출한 것으로, 2중 잣대를 적용했으며, 편견에 가득 찼던 위선적 대외정책이었다.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 정책과 인권외교는 한국과 같은 미국의 맹방을 안보의 약점을 무기로 뒤흔들어 국내의 반정부 운동을 고무·선동하여 유신체제를 취약하게 만들었고, 결국 유신체제는 붕괴되었다. 이것은 카터가 원한대로 진행된 것이다.
닉슨-포드-카터 행정부 시절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전략가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집요하게 추진한 한국의 핵개발 기도를 봉쇄했다고 자축했다. 그러나 미국이 대한민국의 핵개발을 철저하게 봉쇄하는 동안 북한의 핵개발이 은밀하게 추진되고 있다는 점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미국 유권자들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잘못된 정치가의 잘못된 한반도 정책으로 잘못된 한미관계로 갈 수 있다는 쓰라린 교훈을 남겼다. 올해 우리가 미국 대선 결과를 주목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982년에 발행된 카터의 회고록에는 미군 철수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았다. 유일하게 언급된 것은 한국의 반체제 지도자 김대중을 구출하기 위해 미국의 역할에 대해 자랑스럽게 기술한 부문이다.
그렇다면 카터 자신도 미군 철수가 자랑이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인가? 퇴임 후 카터는 몇 차례 북한을 의욕적으로 방문하게 된다. 과연 그는 왜 방북했으며 어떤 태도를 보였던가?
친북 미국 인사 3인방: 그레그, 카터
2010.09.20 도널드 커크 편집위원·전 뉴욕타임스 특파원
북한 김정일이 미국 고위층에서 친구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놀랍게도 북한에서 자행되는 끔찍한 인권 침해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미국의 적지 않은 유력 인사들은 이를 무시하고 북한정권을 옹호하고 있다.
북한을 편드는 악명 높은 옹호자들 가운데 도날드 그레그가 있다. 전 CIA 관리인 그는 조지 H. W. 부시 대통령 시절 1989년부터 1993년까지 주한 미대사를 역임했다. 그레그는 뉴욕의 호사스러운 사무실에서 문화행사와 정책토론회를 하고 있는 ‘코리아소사이어티’의 전임 의장 겸 대표다.
그레그는 수년 간 김대중과 햇볕정책의 추종자였다. 코리아소사이어티가 DJ 재임 시절인 1998년부터 2003년까지 한국정부의 자금으로 운영됐다는 점에서 그의 이런 입장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레그는 북한에 대한 지지를 지금까지 하고 있다. 최근 뉴욕타임스 기사에서 그는 천안함 침몰과 관련, 결백하다는 북한의 주장을 옹호하며 미국의 단호한 대북정책을 호되게 비난했다.
지미 카터는 북한정권은 옹호하고 한국정부는 비난하는 정도에 있어서 그레그 보다 더 하다. 카터는 지난 1월 북한을 무단월경해 투옥된 한 미국인을 구하기 위해 최근 북한을 방문하면서 그의 본색을 잘 드러냈다. 그는 틀림없이 김정일이 약 1년 전 두만강 근처에서 붙잡힌 2명의 여성 미국기자를 구출하기 위해 평양에 온 빌 클린턴을 만났던 것처럼 김정일이 자신을 맞을 것으로 기대했다. 카터는 1차 북핵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1994년 6월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났기 때문에 김정일이 이번에 자신을 만날 것으로 추정했을 것이다. 김일성은 카터와 만난 후 수주일 뒤 사망했다.
카터는 1976년부터 1980년 간의 대통령 재임 시절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 암살당하기 전까지 그를 비판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이것은 카터가 김대중과 친밀한 관계를 가졌다는 반증으로 풀이된다. 당시 김대중은 1980년 5월 5·18을 조장했다는 이유로 투옥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김대중은 레이건 대통령 당시 미국의 강한 압력으로 풀려났고 레이건 대통령은 1981년 1월 전두환 대통령 취임 후 그를 인정했다.
카터는 박정희와 전두환은 그렇게 쉽게 비판하면서 왜 북한정권이 자행하는 더 참혹한 인권침해는 무시하는 것인가? 이것은 미국의 많은 지식인들에게 동일하게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다.
유명한 지식인 가운데는 한국이 한국전쟁을 야기했다고 주장해 유명한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교수가 있다. 그의 책은 객관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북한의 인권 침해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면서 북한을 편드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카터 역시 자신의 새 책 ‘The Korean War: a History’에서 동일한 입장을 반복하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은 드디어 한국전쟁 전체에 대한 바른 설명을 가지게 됐다는 잘못된 인상을 주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북한의 만행은 고사하고 북한이 한국을 침공했다는 언급도 없이 미국과 한국의 잘못에만 포커스를 두고 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북한정권은 자신들의 생존이 핵무기 보유에 달려 있다는 정책을 더 공고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에서 신음하는 수십만 명을 비롯, 김정일 압제에 눌려있는 수백만 명의 북한주민들을 위한 자유의 명분을 배신하고 있다.
그레그에게는 실망스럽겠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의미 없는 핵 합의를 북한으로부터 서명받기 위해 북한을 미국의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한 조지 W 부시 전임 대통령에 비해 북한과 기꺼이 타협할 의사가 있는 것 같지 않다. 김정일이 말할 수 없이 끔찍한 만행을 북한주민들에게 저지르지 못하도록 미국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 것이라는 거짓 약속에 미국이 또 속는 것만큼 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번역·이상민 기자 [email protected]
출처 : 미래한국 Weekly(http://www.futurekorea.co.kr)